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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여성 시네아스트, 홍은원 (1922-1999)

2023-11-25 조회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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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아스트(cineaste)란 불어로 영화인을 뜻하며 영화감독, 시나리오 라이터, 영화제작인등 영화의 스탭(staff)진을 광범위하게 일컫는 용어이다.

홍은원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영화계의 스크립터 및 하부 조감독으로부터 출발, 거의 콘티에 대부분을 자신이 구성했던 제1 조감독을 거쳐 감독으로 입문하였다. 또한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시나리오 "유정무정"을 집필하여 영화화시킨 이래, 적지 않은 시나리오를 집필하였으며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영화 "백치 아다다"의 주제곡을 작사하기도 했다.

홍은원은 한국의 영화사에 있어 "기회가 되어" 메가폰을 잡게된 "여류 감독"이 아니라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정상에 선 진정한 시네아스트였으며 그가 남긴 많은 현장사진과 시나리오및 그밖의 기록자료는 그가 현대문화사에 있어 탁월한 여성 개척자 중의 한사람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홍은원은 1935년 경성 재동 공립학교(현 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경성 공립 경기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40년에는 만주 신경음악단성악부에 입단하여 합창단원이자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으며, 1945년 해방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시낭송을 담당하기도 했다.

경기여고 시절부터 음악과 문학으로 크게 인정을 받던 홍은원은 종합예술인 영화, 특히 당대를 풍미하던 프랑스 영화에 심취하게 되었던 바 중앙방송국의 합창단원과 시 낭송의 일도 뒤로 하고 여배우를 추천하는 최인규 감독의 권유를 뿌리치고 1946년, 고려 영화사에 입사하여 최 감독의 "죄없는 죄인"에서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음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성 시네아스트로 탄생하였다.

결혼과 함께 잠시 공백기를 거친 후 1954년 영화계에 재투신하여 "여군"의 스크립터 겸 조감독 생활을 했으며 향후 "불사조의 언덕" "단종애사(端宗哀史)" "백치 아다다"등 약 10여편의 작품에 스크립터 겸 조감독으로 종사하었으며 "백치 아다다"와 "사랑"의 주제가를 작사하였다.

1959 -1962 사이에는 "조춘(早春)"을 시작으로 "사랑의 십자가", "여인천하", "애정 삼백년"등에서 치프 조감독을 맡음으로써 영화계에서 그 자질을 인정받았다.

1959년 한국 여성최초로 "유정무정(有情無情)"으로 시나리오에 데뷔한 후 1960년 "젊은 설계도" 공동 각색하고 "바위고개", "황혼"의 각본을 담당했다.

1962년 당시에 큰 화제를 뿌렸던 "여판사(女判事)"로 감독 데뷔한 후 1964년에는 "홀어머니"의 윤색과 감독, "연애할 시간이 없다"의 각본을 담당했으며 1965년 "오해가 남긴 것"의 윤색과 감독, 1966년 "하와이 연정"의 각본, "소문난 여자", "댁의 부인은 어떻습니까"등의 각색을 맡았다. 1968년에는 "이별의 모정"의 각본, "흐느끼는 백조"의 각색을 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한국영화진흥공사 창작기금 수령작품인 "피안의 연인(彼岸의 戀人)"과 "호반의 환상곡"등의 작품을 남겼다.

홍은원은 종합예술인 영화 쪽에서 마지막까지도 모든 분야를 두루 거치며 활약했으나 영화 쪽의 일이 다소 뜸해지기 시작한 70년대부터는 구성작가와 낭송등의 방송일을 하는등 음악,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진정한 문화예술인이었다.

홍은원이 추구하는 작품 경향 및 스타일은 예술성 짙은 담백하고 산뜻한 드라마이다. 다만 타인들(제작자 또는 흥행사)의 구미와 요구에 성향을 맞출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생전에 "내세울만한 작품이 없다"고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 했을 정도로 만족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은원의 시나리오나 영화의 당시의 평은 "여성적인 섬세하고 깔끔한"작품들로 인정받았다.

1979년에 영화인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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