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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원과 그 시대 - 여성영화인의 선구자(賢贊 영화평론가)

2023-11-25 조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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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홍은원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56년 무렵, 전창근 감독이 연출한 사극 "단종애사"(1956)의 세트장이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때 나는 일간 신문사의 영화담당기자였다. 반소매 브라우스에 첵크무늬 슬랙스(칠부바지), 벨레모를 쓴 그녀는 마치 프랑스 파리에서 갓 돌아온 양 나를 놀라게 하였다. 청초한 외모속에는 예리한 감각을 풍기는 모습이 매우 인상 깊었다. 홍은원은 그때 스크립터일을 보고 있었다. 그 후에도 이강천 감독이 연출한 "백치 아다다"를 비롯하여 자주 여러 영화 현장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여전히 비슷한 옷차림이었고, 애연가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첨단적인 패션은 마치 홍은원감독의 심볼 마크같이 매스콤에서는 화제가 되었다.
영화제작 현장은 지금도 그렇듯이 거친 공사판같이 부산하고 삭막한 분위기 였는데 당시의 세상에서는 여성으로서는 좀체로 뛰어들기 힘들었고 감내할만한 환경도 아닌데 무척 용감한 여성이구나하고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50년 후반기의 영화계사정은 어떠했던가?
처참했던 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 전쟁이 휩쓸고 간후, 전쟁의 상처가 군데군데 앙상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53년 휴전협정을 마치고 전쟁의 악몽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전후기의 징후가 움틀때기도 했다.
피난도시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온 영화인들도 발빠르게 영화재건의 열정이 용솟음치던 시기였다. 영화인은 물론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명동(明洞)에 모여 들었다. 동방문화회관, 휘가로, 에덴다방, 갈채등이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던 만남의 장소였다. 영화인들은 대체로 휘가로 다방과 에덴 다방을 아지트로 삼았다. 시인 박인환, 시나리오작가이자 평론도 한 유두연, 이진섭, 허백년, 이봉래, 황영빈 그리고 소설가 박계주, 명동백작이란 애칭을 갖은 소설가 이봉구 같은 분들이 하루종일 다방에서 모여앉아 문화이야기에 열을 올렸고, 영화제작사무실이 명동 여기 저기에서 문을 열었다. 60년대 충무로 3가에 영화인들이 모여들기 이전의 이른바 명동시대라고 부를만 하다.
홍은원 감독도 말하자면 명동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래도 영화재건은 다른 문화 예술쟝르보다 급속하게 성장세를 탔다.
54년부터 57년까지를 한국영화사에서는 한국영화 성장기로 분류할 만큼 영화생산량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었다. 6.25 전란을 치른 50년대 초기에는 연 생산량 20편 이내이던 것이 56년부터는 30편, 57년에는 37년으로 늘어났고 58년부터~64년에는 총 748편으로 급팽창하게 되었다.
전쟁을 치르고 난 대중들은 절망과 불안, 허무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변변한 오락도 없었다. 오직 유일하게 영화라는 매체에 쏠리게 된 것이다. 지금과 같이 다양하고 풍성한 레저산업이 없었던 시절, 오직 영화는 유일한 대중의 오락으로 민중들의 안식처이였다.
홍은원 감독이 영화의 미래를 일찍 예견하고 영화에 투신한 것은 그녀가 시대적 감각과 미래 예측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 영화계에 감히 뛰어든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연약하고 섬세한 체질로 험난한 영화 풍토에서 견뎌내고 있는 것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홍은원 감독은 홍진아(洪眞娥), 홍설아(洪雪娥)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영화계에서의 애칭은 영화계의 언니로 통했다.
조부인 홍철주(洪澈周)가 조선조 말 형조판서, 구 한말 한성부윤(漢城府尹, 지금의 서울 시장)과 총판전보국사무(總辦電報局事務, 지금의 정보통신부장관)를 지낸 풍산( 産) 홍가의 유서깊은 명문의 핏줄을 받은 홍은원감독은 1922년 순천에서 태어났다. 당시 은행가였던 아버지 홍우만(洪佑晩)이 호남은행을 창단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으로 부임했던 관계로 오빠인 홍승업만이 서울의 본가에서 태어나고 광주에서 언니가, 순천에서 홍감독이, 그리고 목포에서 남동생이 태어나게 된 것인데 남동생의 탄생 직후 다시 상경, 언니와 함께 안동유치원을 거쳐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 그리고 명문 경기여고를 마치게 된다. 이들 4남매의 교육은 일찍이 신여성으로서 교육자이자 독립사상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 후 일본출판계인 "마루젠"(丸善)이라는 유명 서점 서적부에 입사한 후 1940년 5월 언니를 따라 만주(滿洲)로 건너간 후 만주 신경(新京)음악단 성악부에 입단,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문학소녀였던 그녀가 이제 음악소녀가 된 것이다. 그때 만주영화사에 자주 드나들면서 영화라는 매체에 매료되었다.
그녀의 자전기를 보면 경기 고녀 시절때부터 극장에 자주 가서 특히 프랑스영화에 폭 빠졌다고 한다. "여인들만의 도시(La Kermesse He roique)",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망향 (Pe pe -le-Moko)"등,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소녀시절을 보냈다고 하니 후일 영화계에 뛰어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신경음악단에서는 노래 솜씨가 뛰어나 오페라의 여주인공과 합창단의 솔로 싱어까지 해냈다고 한다.
해방년 여름 휴가로 잠시 경성(京城=서울)에 잠시 귀국했던 때 영화음악을 하던 김준영씨의 소개로 최인규(崔寅奎) 감독을 만난다. 당시 최인규 감독은 가장 촉망을 받던 감독이었다. 마침 최인규감독이 연출하려는 "태양의 아이들"이란 각본을 건네 받고 배우가 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 신통치 않게 생각되어 그대로 만주로 돌아갔다고 한다. 최감독과의 재회는 1946년으로 다시 이어 진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구사일생으로 만주를 탈출 북한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후에는 중앙방송국(현 KBS) 합창단멤버로, 또는 시낭송으로 활약하다가 1946년 최인규 감독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자리에 동석한 사람은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와 자유만세의 여주인역 황려희(黃麗姬), 그리고 한국 최초의 여류감독이된 박남옥(朴南玉)등 이었다고 한다. 1947년 마침내 최감독의 간곡한 권유로 "죄없는 죄인"의 연출부에 합류하게 된 후 스크립터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스크립터(scriptor)란 일은 감독과 카메라맨의 옆에서 촬영되는 모든 샷(shot)을 스크랩터 용지에 빠집없이 기록하는 일이다. 씬과 tit의 넘버, 화면의 스켓치, 배우의 대사, 돌아간 필름의 척수, OK와 NG, 키프할만한 것등을 모두 기록한다. 촬영된 필름은 이것을 기초하여 정리, 편집된다. 촬영 종료후에도 스크립트의 정리를 해야만 한다. 로케이션의 경우는 사이렌트로 촬영된 부분을 후시녹음으로 음성을 넣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기록이 정확치 않으면 혼란을 갖어온다. 현장 진행 상황을 일관되게 파악하여 기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때문에 꼼꼼한 여성 스크립터가 이 일을 맡는 경우가 많다. 홍은원 감독은 "죄없는 죄인(48, 최인규감독)"에서 스크립터로 출발하여 "불사조의 언덕(55, 전창근감독)", "단종애사(56, 전창근 감독)","백치 아다다(56, 이강천 감독)","사랑(57, 이강천 감독)","수정탑(58, 전창근 감독)"등 100여편 이상의 작품에서 스크립터 겸 조감독진의 일을 맡았다. 당시의 명감독과 명카메라맨들의 연출기법과 카메라워크 등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은 후일 연출가로 진입하는데 중요한 영화 수업이 되었고 감독으로 독립하는데 큰 공부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홍은원이 스크립터로서의 기능과 명성은 당시 영화계에 널리 정평이 나있었고 저명한 감독들이 다투어 홍은원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문학적 소양과 음악적 재능, 그리고 영화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은원은 결혼생활 때문에 죄없는 죄인을 마치고 5년쯤 잠시 영화계를 떠난 일이 있었다.
희곡작가인 L씨와의 연애 결혼은 양가 부모의 완강한 반대를 무릎쓰고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었다. 역시 명문가의 후손인 L씨는 홍은원보다 5년 연하로서 이 역시 홍은원의 파격적인 인생이었다.
결혼 생활은 그녀의 표현대로 "노라의 집의 인형"으로 끝났다. 그 사이에서 딸 하나를 얻었는데 그 딸이 바로 마지막까지 인생의 동반자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자 꿈의 분신인 이희재(현 숙명대학교 교수)였다.

1954년 촬영과 연출자로 이름이 높던 한영모 감독의 권유로 영화계에 다시 복귀하여 조정호 감독의 "여군(54)"에 조감독으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스크립터로서 많은 경험은 쌓은 홍은원에게는 자연스러운 경우였다. '54년도 부터 한국영화산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1959년 "유정무정(59, 신경균감독)"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하여 조감독과 시나리오 라이터일을 겸하게 된다.
1959년 시나리오 작가로 정평이 난 유두연이 조춘(早春)을 연출하게 됨에 따라 각색에 참여했던 홍은원은 치프 조감독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치프 조감독이란 감독을 보좌하는 조감독들 중의 으뜸의 자리여서 30여명에 이르는 뒷스탭을 지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유두연은 평론, 시나리오에서 정상급이었으나 연출에는 경험이 없었던 탓으로 홍은원의 영화경험과 도움이 절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같은 해 역시 유두연의 연출로 제작된 "사랑의 십자가"에서도 치프로 조감독 일을 맡게 되었고 그 뒤 노장 윤봉춘 감독의 사극 "여인천하(62)", "애정 3백년(63)"에서도 조감독 일은 계속 되었다.
수십여편의 영화에서 단단한 기초를 닦은 홍은원의 영화수업은 마침내 결실을 맺어 감독으로 진출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1962년 "사랑의 십자가"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카메라맨 장환(張煥)의 제의로 마침내 "여판사"에서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홍은원의 절정기였다. "여판사"는 실화에 근거한 드라마였다. 남편의 열등의식과 계모인 시어머니, 시누이의 갈등속에서도 아내로서, 또한 판사라는 직책을 다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헤쳐간 한국 최초의 여판사를 모델로 쓴 시나리오 였는데 아직도 봉건 잔재와 남존여비의 이조시대의 윤리와 관습이 팽만하던 당시의 사회에서 여성들의 공감을 살만한 소재여서 여성감독을 캐스팅하게 되었고 흥행에서의 성공도 겨냥한 기획이었다. 홍은원이 드디어 박남옥의 미망인(55)이래 두 번째 여류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박남옥은 "미망인" 한편을 끝으로 영화계의 뒷전에 물러섰고, 문자 그대로 영화계의 홍일점으로 홍은원은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여성주의와 같은 극명한 주장은 약했지만 여자이기에 견뎌 내야 하는 이 땅의 가슴 아픈 현실과 여성의 고통이 점점이 깔려있고 작품으로서 당시의 매스컴은 대서특서했다.
이어 64년에 "홀어머니"를 감독한다. 자식들을 지키며 고난의 삶을 이어가는 홀어머니, 그러나 자식들은 어머니의 고통이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행복만을 찾아 뿔뿔히 흩어진다. 인고와 희생으로 오직 어머니의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한국의 어머니상을 주제로 한 드라마였다.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병석에 누어있는 어머니를 찾아온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끝까지 자식들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고요히 숨을 거두는 어머니는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66년에 감독한 "오해가 남긴것"은 세 번째 작품이었다. 기생이라는 신분이었으나 사랑하는 남자에게 순정으로 뒷바라지를 해온 한 여자, 여자의 도움으로 외국 유학길을 떠났던 남자는 여자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오해 때문에 여자를 버린다. 순정과 헌신으로 남자를 사랑했던 한 여인은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스토리 였다.
남성 이기주의, 여성의 희생과 봉사, 그리고 남성의 배반등은 신파극이래의 한국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이러한 영화들이 여전히 여성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던 시대였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감독이전에 여성인 홍은원의 드라마 해석은 돋보였다. 적극적인 주장은 약했어도 피압박적인 한국여성을 통해서 이기적인 남성사회를 고발하려는 주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 작품을 끝으로 홍은원의 감독 생활은 막을 내린다. 한국 영화는 황금시대를 맞은양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나 한국 영화계의 풍토는 그야말로 전국시대에 들어갔고 제작계는 흥망성쇠를 되풀이 했던 시기였다. 60년대 후반부터, 50년대의 명동 시대는 끝나고 영화 시장의 중심은 충무로 3가 속칭 한국의 허리우드라는 충무로 시대로 이동하였다. 신진기예한 젊은 감독들이 다수 나타났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풍토에서 홍은원은 그래도 용케 견뎌냈으며 생존했다고 볼 수 있다. 홍은원은 시나리오, 방송원고등을 쓰는 글쓰기 생활로 돌아갔다. 유정무정(59)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등단한 그녀의 작품활동은 왕성하여 시나리오 작가로 명성을 얻었고 많은 작품에 각본, 각색 윤색등으로 참여 했다. 그때의 필명은 홍진아(洪 眞娥)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75년에 영화진흥공사의 지원작품으로 "피안의 연인(75)", 그리고 마지막으로 쓴 시나리오는 "호반의 환상곡(77)"등이 있었다.

59년 11월 11일자 동아일보 문화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아마도 필자가 쓴 기사로 기억한다. "영화계의 젊은 지대(제목). 이채로운 두 5인조 탄생, 우리 필림과 신예푸로,-극장을 중심으로한 강대한 체인 형성과 전속 스타제의 확대로 급템포로 변모하고 있는 요즘은 영화제작계에 군소 프로덕션의 새 활로가 모색되고 있는 가운데, 상업 영화계의 위기를 부르짖으며 전위적인 작품활동을 표방하고 나선 "우리필림"과 "신예 프로"가 나타났다.
제 1그룹은 유현목감독까지 가담한 "신예프로"로 여기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전홍식, 시나리오 작가 김지헌과 이성구 감독, 이광원 감독등이고 두 번재 그룹은 전창근 감독아래서 조감독 경험을 쌓은 이종기, 김기덕과 연출계의 홍일점인 홍설아(洪雪娥=홍은원)등이다. 이 두 그룹은 보다 높은 작품의 질로서 기성배우, 기왕의 레퍼토리에 식상한 팬들을 확보 할 것을 제작 강령으로 삼고 국산 영화계의 전위대가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
홍은원의 열정과 새로운 전신을 짐작케 하는 내용으로 그녀의 만만치 않은 도전과 실험정신을 느끼게 한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계 풍토는 그러한 도전과 실험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너무나 장벽이 높았다. 지방 흥행사가 제작계를 좌지우지 했고, 감독의 작가적인 양심과 양식이 통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홍은원이 세 작품의 연출을 끝으로 메가폰을 놓게 된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홍은원은 두 편의 영화 주제가를 작사하였는데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는 지금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는 영화 주제가이다. 작곡계의 거목 김동진 작곡으로 백치 아다다의 히로인 나애심이 노래를 부른 이 주제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백치아다다 주제가(일절)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때
검은 머리 큰 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
꽃가마에 미소짖는 말못하는 아다다야
차라리 모를 것을 짧은 날에 그 행복
가슴에 못 박고서 떠나버린 님 그리워
별 아래 울며 새는 검은 눈에 아다다여
.
.
주제가 치곤 한편의 시와 같이 애절하고 아름다운 노래였다.
70년대를 분기점으로 영화는 한풀 꺽인 사양산업으로 접어 들었다. TV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한국의 헐리우드라고 불리운 충무로 3가의 영화시장도 차츰 시들어 갔다 홍은원은 안산에 자리잡은 그의 자택에서 딸 이희재 박사와 함께 만년의 인생을 조용히 보냈다.
76년, 월간 세대에 그녀가 쓴 글 "여류 영화감독의 비애"라는 제목의 글은 그녀의 심정을 잘 나타낸 글이다. 그 글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유두연씨가 한말이 생각난다. "홍은 환갑이 지나도 다람쥐처럼 영화판을 누비고 다니며 카나리아 같이 노래를 부를 거야" 그러나 그 말은 이미 내게서 멀어진 말이 아닌가? "유선생님, 환깁은커녕 50도 못돼서 나에게는 발들여놀 한 뼘의 공간도 없어진 영화 현장이 되었어요. 그리고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는 많은 친구를 저 세상에 보내고 노래마저 영영 잊었어요. 아, 가만히 있어봐요. 어디선가 노래소리가 들리네요. 아직은 확실치가 않지만 그 소리는 내 딸 아이의 목소리 같아요. 엄마가 잊은 노래를 어쩌면 나의 딸 아이가 찾아줄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애가 엄마 닮아서 영화하면 미치도록 좋아 하거든요. 하지만 아마 그 애는 나처럼 승산없는 일에 뛰어들지 않을 거예요.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면 뛰어 들겠죠. 그렇게 믿어요. 꼭 그렇게 믿고 있어요. 내가 낳은 작품중에는 가장 우수하다고 볼수 있는 영리한 아이거든요."

그 딸아이가 바로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도서관장을 맡고 있는 이희재 박사다.
희곡작가 L씨 사이에서 낳은 그 딸은 프랑스 파리 제 7대학에서 문학박사까지 마친 재원으로 딸 역시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했으나 험난한 영화현장에서 고생한 어머니의 내력을 겪었던 까닭인지 영화보다는 문헌학을 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박사는 어머니와 평생 동지였고 어머니의 이루지 못한 소망과 꿈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홍은원 여사는 만년에 곧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홍은원의 작품 다운 작품을 꼭 남기고 싶었는데 "
이런 아쉬움은 홍은원 여사가 죽는 날까지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50~60년대 스크립터로, 시나리오 작가로, 조감독, 감독 등 누구보다도 다양하게 활동한 홍은원은 단순한 여류 영화인의 행적을 넘어서 한국영화사의 숨은 밑거름이었다. 1979년 영화유공자로 표창을 받은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한국 영화사에는 박남옥 감독이 여류감독 제 1호로 기록되고 있다. 박감독은 미망인 한 작품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1965년 신상옥 감독의 부인이자 여배우인 최은희가 좋은 환경속에서 세 번째 감독을 맡아 " 민며느리"등을 만들었고, 70년에 황혜미가 "첫경험"으로 네 번째, 그리고 80년대에는 이미례가 "수렁에서 건진 내 딸"로 다섯 번째 여감독, 1990년대에는 이정향이 "미술관옆 동물원"에서 여섯 번째 여감독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영화계에 관련한 연도나 업적, 작품수를 보아도 홍은원을 대표적인 여류감독으로 꼽는데는 이론이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도 홍은원은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자적인 개척자였다.

격동의 시대를 몸소 부딧치며 온갖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았던 그녀의 용기있는 생애는 길이 남을 만하다.
홍은원은 1999년 1월 5일 입원해 있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숨을 거두웠다. 만 76세였다.
최근 홍은원의 재조명을 위해 그의 따님과 후배 여성영화인들이 그의 유품과 필모그라피를 뒤지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단순히 한 여성이자 한 어머니에 대한 추모를 떠나서 한국영화사의 잃어버린 부분을 복원하고 재조명하자는 것이 기획의도라고 한다. 아쉽게도 그의 작품은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남은 것은 시나리오와 글쓴 것, 매스컴에 실린 글 등이고 여기에 고인의 인간과 업적을 잘 아는 몇 분들이 회고담으로 거들고 있다.
50~60년대, 영화저널리스트로 일하던 나로서도 스스로 참여하게 되었다. 아득한 기억, 망각의 늪속에서 건저낸 내 기억의 단장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어렴풋하던 그녀의 초상화가 차츰 선명한 영상으로 다가 온다. 최근 여성 영화인들의 활동의 영역이 부쩍 넓어지고 영화분야에도 여성시대가 분명 다가 오고 잇는 세상에서 홍은원에 대한 재조명 정리작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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