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작가는 영상(映像)이라는 정선된 언어(言語)를 몽타즈(montage)라고 일컬어지는 영화문법(映畵文法)에 따라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문학이나 미술, 혹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영상작가에게도 그 작가만이 향유할 수 있는 작가세계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말과 같지를 않아서 남들로부터 인정받을만한 작가세계를 구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물론 그것은 영화가 다른 여타의 예술에 비해 '제7예술'이라는 후발형식(後發形式)인데서 기인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탄생과 발전은 '변화'와 '변천'의 연속일 뿐, 잠시도 제자리에 멈추어 있기를 거부하였다. 세계의 영화사가 그 '변화'와 '변천'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영화감독 홍은원(洪恩遠)은 여성이다. 구태어 여성임을 강조하는 것은 영상작가의 영역이 남성들에 의해 독점되다싶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영화사를 들쳐 보면 미국 남가주대학의 영화학 교수 클라라 베란저(Clara Beranger), 『시나리오 강화(講和)』를 쓴 시나리오 작가 프랑시스 마리온(Frances Marion) 등과 같이 걸출한 여성 시나리오 작가가 있었던 것 처럼, 홍은원 감독도 시나리오 작가를 겸한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점에서 시네아티스트라고 불러 마땅하다.
우리나라의 영화계에 여성감독으로 등록된 첫 번째 케이스는 1955년 미망인 으로 데뷔한 박남옥(朴南玉)이다. 그리고 7년 뒤인 1962년에 화재작 여판사 로 두 번째의 여성감독으로 홍은원이 데뷔 한다. 물론 두 사람의 뒤를 이어 황혜미, 최은희 등의 여성 영화감독들의 활약이 있었으나, 앞서 설명한 것 처럼 자신들만의 독특하고도 개성적인 영상세계를 이루어내기는 쉽지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홍은원에게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오직 영화감독 의 영역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를 겸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는 것은 세계가 공통된다. 좋은 시나리오의 조건으로는 강렬한 주제의식(主題意識)이 거론되고, 짜임새 있는 드라마투르기가 있어야 한다고들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인간탐구(人間探求)의 집요함이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인 모순점의 개선에 나선 사람들 , 다시말하자면 도전적인 소재와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살려낼 수가 있어야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할 수가 있다.
2
시네아티스트 홍은원이 태어나고 성장한 배경과 영화계로 입문하게 된 동기를 영화평론가 호현찬(扈賢贊)의 글에서 옮겨본다.
조부인 홍철주(洪澈周)가 조선조 말 형조판서, 구 한말 한성부윤(漢城府尹: 지금의 서울 시장)과 총판전보국사무(總辦電報局事務: 지금의 정보통신부장관)를 지낸 풍산( 山) 홍가의 유서깊은 명문의 핏줄을 받은 홍은원 감독은 1922년 순천에서 태어났다. 당시 은행가였던 아버지 홍우만(洪佑晩)이 호남은행을 창단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으로 부임했던 관계로 오빠인 홍승업만이 서울의 본가에서 태어나고 광주에서 언니가, 순천에서 홍감독이, 그리고 목포에서 남동생이 태어나게 된 것인데 남동생의 탄생 직후 다시 상경, 언니와 함께 안동유치원을 거쳐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 그리고 명문 경기여고를 마치게 된다. 이들 4남매의 교육은 일찍이 신여성으로서 교육자이자 독립사상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 후 일본출판계인 '마루젠(丸善)'이라는 유명 서점 서적부에 입사하였다가 1940년 5월 언니를 따라 만주(滿洲)로 건너간 후 만주 신경(新京)음악단 성악부에 입단,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문학소녀였던 그녀가 이제 음악소녀가 된 것이다. 그때 만주영화사에 자주 드나들면서 영화라는 매체에 매료되었다.
그녀의 자전기를 보면 경기 고녀 시절때부터 극장에 자주 가서 특히 프랑스영화에 폭 빠졌다고 한다. 여인들만의 도시(La Kermesse He roique) ,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 망향 (Pe pe -le-Moko) 등,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소녀시절을 보냈다고 하니 후일 영화계에 뛰어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신경음악단에서는 노래 솜씨가 뛰어나 오페라의 여주인공과 합창단의 솔로 싱어까지 해냈다고 한다.
해방년 여름 휴가로 잠시 경성(京城=서울)에 귀국했던 때 영화음악을 하던 김준영씨의 소개로 최인규(崔寅奎) 감독을 만난다. 당시 최인규 감독은 가장 촉망을 받던 감독이었다. 마침 최인규감독이 연출하려는 '태양의 아이들'이란 각본을 건네 받고 배우가 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 신통치 않게 생각되어 그대로 만주로 돌아갔다고 한다. 최감독과의 재회는 1946년으로 다시 이어 진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홍은원은 구사일생으로 만주를 탈출 북한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후에는 중앙방송국(현 KBS) 합창단 멤버로, 또는 시낭송으로 활약하다가 1946년 최인규 감독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자리에 동석한 사람은 순애보 의 작가 박계주(朴啓周)와 영화 자유만세 의 여주인공역 황려희(黃麗姬), 그리고 한국 최초의 여류감독이된 박남옥 등 이었다고 한다. 1947년 마침내 최감독의 간곡한 권유로 죄없는 죄인 의 연출부에 합류하게 된 후 스크립터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洪恩遠과 그 時代 에서
1950년, 6·25의 격렬했던 소용돌이는 홍은원에게도 큰 공백을 안겯다 주었다. 영화인들은 전선으로, 피난지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남아있어야 했던 홍은원은 홀로 영화서적을 탐독하면서 다시 찾아올 복귀의 기회를 노려야 했다.
1954년, 비로서 어둡고 답답했던 전란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한국영화는 활기를 찾게 되었다. 홍은원은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다. 여군(1954: 조정호 감독) , 불사조의 언덕(1955: 전창근 감독) , 단종애사 (1956: 전창근 감독) , 백치 아다다(1957: 이강천 감독) , 사랑(1957: 이강천 감독) , 수정탑(1958: 전창근 감독) 등의 조감독과 스크립터를 겸한다. 이 기간동안에 홍은원은 백치아다다 와 사랑 의 주제가를 작사하여 갈채를 받았고, 나애심이 부른 백치아다다 는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마침내 홍은원은 치프 조감독이 된다. 한국영화의 경우 촬영현장은 언제나 남자들의 독무대이곤 했다. 하중이 무거운 영화기재를 다루기 위해서는 욕설이 난무하고, 냉방기가 없었던 여름 촬영장은 반나체나 다름이 없는 동료 조감독들의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광란하는 곳이지만, 홍은원은 언제나 단정한 멋쟁이로 그들의 누님으로 군림하면서 따르는 후배들을 달래고 지도해야 하는 치프조감독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해냈다.
이때 만들어진 영화가 조춘(1959: 유두연 감독) , 사랑의 십자가(1959: 유두연 감독) , 여인천하(1962: 윤봉춘 감독) , 애정 3백년(1963: 윤봉춘 감독) 등 이다.
1959년, 마침내 홍은원은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다. 촬영현장에서 꼼꼼히 챙겼던 스크립터로서의 책무와 연출부의 치프로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녀의 첫 시나리오 유정무정(有情無情: 1959: 신경균 감독) 을 발표하였다. 여성감독도 귀한 때였으나, 여류 시나리오 라이터도 전무했던 시절임을 감안한다면 참으로 당당한 등장이 아닐 수 없다.
시나리오 유정무정 은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 일각의 현실문제로 자주 등장되었던 축첩(蓄妾)으로 인한 여성의 비극을 극단적인 에피소드를 채용하여 극렬한 대립과 갈등으로 그려낸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다.
문영각 출판사의 부장인 성종훈(39)는 마음씨 착한 본처 이주실(34)의 사이에 소생이 없었으나, 소실(그 때는 첩이라고 불렀다) 강선녀(29)와의 사이에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본처와 소실의 대립을 격렬하게 그리면서 아이들을 빼앗고 빼앗기는 드라마트루기는 그때까지 한국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전현적인 삼감관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홍은원은 영화의 현장(특히 스크립트나 연출부에서)에서 체험한 여러 상항을 풍부하게 살려내면서 축첩으로 시작된 여성의 비극을 그야말로 통열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실인 강선녀는 두 남매를 본처의 집으로 보내놓고 방황을 거듭한다. 그 방황은 심리적인 갈등과 위기를 안고 클라이막스로 향해 상승한다. 추석을 하루 앞두고 선녀는 남매들이 살고 있는 본처의 집으로 찾아간다.
S#114·주실집 대문 밖(밤)
선녀가 선물을 한아름 안고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아이들의 방을 쳐다보고 있다.
이때 한 대의 택시가 멈추며
선녀는 소르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한다.
주실이 차문을 열고 내린다.
선녀 몸을 피할려고 황급히 담옆으로 숨으려는데 선물상자 가 담모퉁이에 부딪치며 떨어진다.
선녀의 손끝이 상자를 주으려는데 문득 여인의 발이 하나 손앞에 멈춘다.
선녀는 조심스레 그 여인의 발끝에서 차츰 상체로 흝어서 올라가다가 문득 주실과 눈이 마주 친다.
어느때인가 극장앞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 아닌가 .
한 없이 부드럽고 인자한 주실의 눈이 선녀를 내려다본다.
선녀는 그제야 허리를 펴며 뚫어지게 주실을 주시한다.
주 실 "저 누굴 찾으시는지."
선 녀 "당신이 바로 이 집에 사는 분이에요?"
주 실 "네 제가 바루 이 집 종훈의 아내되는 사람인데요!"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선 녀 "(금시 얼굴색이 변하여지며) 흥, 그러세요. 난 아이들의 에민데요. 내일이 추석이니까 아이들이 잘 있나 보러왔지 만, 당신의 얼굴을 보니 그것마저 보기 싫군요."
주 실 "그러세요. 자, 잠시 들어가시지요 ."
선 녀 "나같은 년이야 이런 으리으리한 집엘 감히 들어갈 수 있 어요."
주 실 "아마 무슨 오해를 하시는 모양 같은데, 내 마음을 좀 이 해해 주세요."
선 녀 "흥, 당신 마음만 마음이고 내마음은 마음이 아닌가요."
주 실 "글세 누가 아니래요. 들어갑시다."
하면서 조심스럽게 잡는 손을 홱 뿌리치는 선녀.
선 녀 "놔요 .나도 천치고 바보지만, 당신도 그리 대수로운 여 자는 아닌데요. 당신같은 사람에게 내 자식을 맡기 내 가 정말 바보구 천치군요 (하며 울음이 맺힌다)
주 실 "피차가 괴롭긴 마찬다지 아니에요. 우리는 다만 여자라는 운명을 타고 났기에 쓰라린 운명도 달게 받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선 녀 "난 무식한 년이 돼서 운명이구 뭐이구 몰라요 ."
주 실 "남편을 위하고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다면 나는 언제라두 희생할 생각이에요."
주실의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주 실 "그러니까 어느때든지 대문을 열어놓을테니 마음이 내키 시면 아무때든 찾아 오세요 그것이 보람만 될 수 있단 면 나는 언제던지 (하며 눈물을 닦는다)
진 우(E) "엄마 !"
주 실 "(홱 돌아보면서) 자 어서 들어갑시다.(하며 다시 선녀의 손을 이끈다)
선 녀 "들기 실어요 . 그런소리 들으러 온건 아니예요. 이 이 상 말할 것도 없고 나도 이제 다실 찾아올 필요두 없으 니까 부디 잘 살아요 아이들이 잘 되나 못되나 그건 당신이 책임져야해요. 어건 아이들에게 입혀줘요. 부디 훌륭한 아내가 되고 훌륭한 어미니가 되서 행복하게 살 아달란 말이에요!"
하고는 물건을 억지로 주실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총총 히 사라져간다.
터져오르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바라보는 주실의 눈 에는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누가 읽어도 느낌은 마찬가질 것이다. 운명적으로 갈라진 두 여인의 만남, 그리고 격하게 솟아오르는 감정을 여과 없이 담아내고 있는 이 장면은 당시의 한국영화가 구사하는 정점부(頂点部)를 상상하게 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시나리오 우정무명 은 영화사의 강청을 이기지 못한 홍은원이 한국영화의 현장체험을 극렬하게 반영한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 홍은원은 임옥인(林玉仁) 원작의 젊은 설계도(1960: 유두연 감독) 를 각색하였고, 추식(秋湜) 원작의 라디오 드라마 바위고개(1960: 조정호 감독) 를 각색한다. 그리고 데오드리 드라이저의 황혼(1960: 박영환 감독) 을 곽일로(郭一路)와 함께 번안각색(飜案脚色)하여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주가를 높혀가기 시작하였으나, 한국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체험이 풍부하고 세심한 감정처리에 능한 홍은원에게 감독데뷔의 유혹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하다. 스크립트에서 치프조감독으로, 또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명성에 제2호 '여류감독'이라는 매력을 꿈많은 홍은원은 뿌리칠수가 없었다.
3
1962년, 홍은원은 화제의 영화 여판사 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여판사 는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한 여판사의 자살을 소재로 한 사회성 짙은 작품이다.
여판사라는 아내의 사회적인 지위에 열등감을 느낀 남편과 이에 평승하여 며느리를 오해하고 핍박하는 계모인 시어머니와 또 거기에 한술 더 뜨는 시누이의 등살을 묵묵히 견디어내면서 아내로서의 직무를 충실이 다하면서도 여판사라는 막중한 책무를 다하려는 한 지식인 여성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양립하려는 고민을 그린 작품 이라고 '한국영화총서(1972)'는 적고 있다.
시나리오는 이미 바위고개 로 호흡을 맞추었던 추식이 썼고, 홍은원 스스로 윤색하여 제작여건과 연출영역을 확대했던 탓으로 완성된 여판사 는 탄탄한 짜임새와 세심한 여성심리의 묘사가 돋보인다는 호평을 받았다.
홍은원의 두 번째 연출 작품인 홀어머니 는 1964년에 선보였다. 김석민(金石民)의 시나리오를 홍은원이 스스로 윤색(潤色)하였으므로 자신의 연출의도를 잘 살려낸 작품이다.
미망인(조미령)은 모든 희망을 오직 자식들에 걸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자식들을 위한 고생이라면 어떤 고난도 참고 이겨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란 자식들은 어머니의 정성을 아랑곳 하지 않고 저마다 자신의 행복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마침내 어머니가 몸져 눕는다. 자식들은 끝내 무심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과거를 뉘우치고 어머니의 곁으로 모여 들었다. 그로써 만족한 어머니는 자식들의 장래를 축복하며 미소 짓고 숨진다.(한국영화총서)
영화 홀어머니 에 대한 당시 영화계의 평가도 호평일색이었다. '자식들에 대한 인고와 희생을 감내하는 숭고한 어머니상을 리얼하게 그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는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1966년, 김문엽(金汶燁)의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연출하여 홍은원 감독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오해가 남긴 것 이 발표된다.
비록 기생(김지미)이었어도 순정을 바쳐 사랑한 남성(남궁원)이 있었다. 급기야 그는 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는 가난한 그의 유학비를 머련해 준다. 그녀는 그의 귀국만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주위의 온갖 유록을 물리치며 순정을 지켜간다. 그러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그는 그녀가 부정했다는 주위 사람들의 모함을 곧이듣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녀는 배신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을 수 밖에 없었다.(한국영화총서)
유교적인 사회에서의 여성상은 인종의 미덕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조선왕조에서부터 기인된 남성우위의 전통적인 관습은 여성들의 자유의사를 속박하였고, 행동반경을 제약하게 하였다. 이같은 사회적인 통념의 테두리에서 한국의 여성영화가 만들어져 왔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못한다.
이러한 사회통념에 대해 홍은원 감독은 저항한다. 거친 몸짓과 재빠른 손짓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리얼한 영상으로 여성들의 여린 삶을 그려가는 홍은원의 영상은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 그녀의 의욕이 살아있는 야심작 오해가 남긴 것 도 처연한 사회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한 여성의 끊질기고도 가치 있는 삶을 리얼하게 그려 나갔다. 이때까지 여성을 소재로한 한국영화의 내용은 소위 신파조 멜로드라마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홍은원 감독의 과감한 도전은 당시의 풍조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는 찬사를 얻어냈다.
홍은원이 감독한 영화는 불행하게도 여판사 , 홀어머니 , 오해가 남긴 것 의 3편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홍은원이 영상작가로서의 소임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홍은원은 다시 시나리오의 집필에 의욕을 불사른다.
1966년에는 소문난 여자(이형표 감독) , 댁의 부인은 어떻습니까(이성구 감독) 을 윤색하였고, 1967년 하와이 연정(현상열 감독) 의 원작을 발표한다. 이 때부터 홍은원은 홍진아(洪眞娥), 홍설아(洪雪娥) 등의 예명을 쓰기도 했다.
1969년에는 오리지날 시나리오 이별의 모정(이종기 감독) 을 발표한다.
남편에게 버림 받은 그녀(이경희)는 두 남매를 어느 독지가에게 맡긴다. 그후 그녀는 온갖 세파를 헤치면서 아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돈을 번다. 그녀는 아이들을 찾으려 그전의 독지가를 찾아간다. 아이들은 그 독지가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헤어진 남편과 동거중인 정부의 집에 맡겨져 온갖 학대 끝에 병원에 입원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황급히 그녀가 병원으로 달려 갔을 때는 이미 딸이 숨 진 다음이었다.(한국영화총서)
이 역시 홍은원 감독이 추구하는 일관된 여성영화의 한 패턴이었고, 1968년에 최미나(崔美那)가 쓴 시나리오 흐느끼는 백조(강대진 감독) 를 각색하였다. 이어 1970년에는 일본작가 마쓰야마 젠소(松山善三)의 원작을 김강윤(金剛潤)와 공동으로 각색한 동경의 밤하늘(이성구 감독) 을 발표하면서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4
홍은원이 추구하는 인간탐구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여성들에게만 적용되어왔던 가혹한 사회통념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삶을 그리고 있으며, 둘째는 등장하는 인물(특히 여성)들의 심리묘사에 탁월하다는 점이다.
이와같은 홍은원 감독의 특질은 그녀가 쓴 모든 시나리오에 일관되게 그려지고 있으며, 그녀가 감독한 영화에도 집요하게 묘사되어 있다. 결국 홍은원 영화의 특징은 여성영화의 전형을 세우는 일관된 작업이었으며, 또 그것은 여성들을 핍박하는 유교적 사회의 통념에 저항하는 작은 여성운동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199 년, 영화진흥공사에서 공모한 진흥기금에 입선안 오리지날 시나리오 피안의 연인 은 홍은원 감독이 탐구하는 여성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나리오에는 두 사람의 여성이 등장한다. 한사람은 일본인 남성인 시라이 도오루와 푸라토닉 러부를 하면서 '너무도 사랑하기에 견혼을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헤어저야 했고, 또 한사람인 미숙은 사랑하는 남편을 북쪽에 두게 된다. 사랑을 잃었다는 공통점을 두 여인은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세월은 흘러 시라이 도오루의 딸인 가 한국을 방문하여 아버지의 프라토닉 러부의 주인공인 소진을 찾는데서 시나리오는 시작된다.
두 여인은 이국에서 온 젊은 여성을 맞기 위해 준비에 몰두한다.
S# 30· 소 진의 치킨
미숙 바쁘게 일손을 놀리고 있다.
소진 양파 껍질을 벗기며
소 진 "집에 안가봐도 돼?"
미 숙 "누가 기다린다구 ."
소 진 "며느리는 그렇다치고 영배는 그래두 기다릴 거 아냐.'
M·조용히 흘러나오는 샹송 '이자벨'
미 숙 "며느리 얻은 날이 아들 잃는 날이야 시라이시상 때문에 공 연히 그이 생각이 치밀어서 (눈물을 닦으며) 그이도 돌아갔 을 거야. 이젠 살아서 만나보긴 글렀어. 남북회담인가 뭔가 말뿐인걸 ."
소 진 " 그래도 미숙이에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잖아 내겐 아무도 이젠 없어."
미 숙 "차라리 난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듣는게 날 것같은 때가 있 어."
소 진 "그거야 말이 그렇지 ."
미 숙 "아냐 정말! 난 가진 고생 다하고 영배를 혼자 키웠는데, 그이 가 그쪽에서 다른 여자라도 얻어서 살고 있다면 너무 억울 하잖아."
소 진 "하는 수 없잖아. 용서해 줘야지."
미 숙 "얘! 넌 엣날에 니가 시라이상 사랑할 때 영원히 사랑하기 위 해 결혼은 안다고 한 말이 잊혀지지 않아."
세월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된 소진과 미숙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고, 서로의 과거를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연민이 아주 각별하게 잘 그려져 있다. 바로 이러한 섬세한 심리묘사를 리얼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홍은원 감독의 강점이다.
물론, 소진과 도오루의 젊은 시절을 그려가는 홍은원의 섬세한 필력도 영화적이다. 여기서 '영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사고(思考)가 영상적이라는 말과 같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반전사상을 가진 도오루와 소진이 고궁 담모퉁이에서 일본인 형사에게 불신검문을 당한다.
홍은원은 이 긴장된 장면에서도 유머가 넘치는 문학적 대사와 영화적인 지문을 구사하고 있다.
소진 안도의 한숨을 내려쉰다.
눈길이 마주치는 소진과 도오루
갑자기 친밀감을 느끼며 웃어버린다.
소 진 "어머 시라이상 웃는 얼굴 처음이네요.'
도오루 "그했든가? 어처구니 없을 땐 나도 곧잘 웃지."
소 진 "(걷기 시작하며) 시라이상 나이를 물어서 혼났어요."
도오루 "난 누구냐고 하길래 귀찮아서 약혼자라고 했오(쓰게 웃는다)" 소 진 " (무엇인지 벅찬 감정) "
도오루 "소진양 나이를 묻길래 스무살이라고 했는데 ."
소 진 "어머나, 바로 맞추셨네요."
도오루 "그것참!"
소 진 "시라이상은요?"
도오루 "시작하고 끝이요.'
소 진 "네?"
도오루 "같은 20이지만 난 마지막자가 붙으니까."
소 진 "스물 아홉이군요."
도오루 "할일 없이 사흘 후면 30줄에 들게 되지 ."
소 진 "(기뿐듯이)거울 깨지면 안좋은 일이 있다고 일본 여자들도 꺼리죠?"
도오루 "그렇지."
소 진 "저 오늘 저녁때 거울 깼어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우연히 이렇게 시라이상을 만났어요 ."
도오루 대답 없이 약간 심각해진 얼굴.
극도로 고양된 긴장감을 풀어가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절제된 대사가 두 사람의 내면을 여과없이 담아내고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가지만 통속적인 시츄에이션으로 몰아가지는 않는다. 되도록 현실감을 살리면서도 때묻지 않은 사랑을 그려가는 홍은원의 집념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S# 63·기숙사의 방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온 소진과 도오루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도오루 "정말 괜찮겠오?"
행복하게 끄덕이는 소진
가물가물 졸고 있는 가로등 밑으로 방울소리를 내며 마차가 지 나 간다.
한마디 말도 없이 가로등 앞에까지 이르는 그들은 헌헌히 선다. 소진의 맑은 눈.
도오루의 눈빛이 뜨거워 진다.
가슴이 뛰는 듯한 소진. 그러나 그 눈길을 피한다.
도오루 "(이윽고) 너무 오래 바람 쐬면 안돼요. 자아, 내가 다시 기숙 사 앞까지 제려다 주지."
소진의 목도리를 돌려 입을 싸매주고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 는 그들.
그러나 헤어지기 안타까운 마음에 발걸음은 무겁다.
다가오는 문앞. 두 사람은 다시 마주보고 선다.
목도리로 가리워진 조그만 얼굴에서 눈만이 이슬먹음은 듯 빛 나는 소진.
도오루의 눈을 잠간 스쳐가는 슬픔.
이윽고 도오루는 조용히 손을 내민다.
도오루 "올해 소진양에게 소설이 당선되는 행운부터 찾길 빌겠오."
홍은원 시나리오의 정서를 아주 절절하게 읽을 수가 있다. 리얼한 대사도 그렇지만, 그 사이사이에 담겨진 지문(指文)은 연출감과 편집감까지 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홍은원의 몸에밴 현장체험이 그대로 문자로 옮겨진 결과이다.
시간은 다시 흘러 2차 세계대전은 일본국의 패전으로 끝난다. 비록 푸라토닉 러부로 달려온 두 사람이지만, 도오루는 패전국의 쓰라림을 맛보아야 하는 청년이 되었고 소진은 잃었던 조국을 다시 찾는 환희의 소용돌이를 맞보아야 한다. 그 상반된 시츄에이션은 '헤어짐'이란 비극을 잉태할 수밖에 없다.
그르므로 해방된 어수선함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만난 두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홍은원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S# 121·도오루의 방
창가에 돌아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소진-. 미동도 안한 다.
다다미 방 한쪽 구석에 다리를 뻗고 앉은 도오루는 소진의 그 모습을 스케치 하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도오루 "소진양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몇번을 붓을 들어봤는데 영 떠 오르질 않더군."
소 진 "(돌아서며) 절 그리고 싶으세요? (하고보니 도오루가 그리고 있다) 어머, 전 그것도 모르구 ."
도오루 "뭘 생각했오?"
소 진 "이젠 허어지면 영원히 못만날 것을요.(슬프다)
도오루 "지금 떠나겠오?(새삼 충격을 느낀다)
소 진 "(고개 저으며)저 오늘 밤은 선생님 곁에서 지내겠어요."
도오루 "소진!"
소 진 "그리세요! 황혼을 안고 창가에 선 이브를 그리세요. (옷을 벗으려고 한다) 저의 영혼을 붙태운 첨이자 마지막인 사람 도오루상에게 드리는 저의 간난한 선물 ."
도오루 "그냥! 소진 옷을 입어요. 그저 그렇게 거기 앉아 있어주면 돼! 소진의 눈, 코, 입, 귀, 모든 것을 내 망막 속에 사귀어 놓겠어."
소진 와락 도오루의 품으로 달려든다.
불길같은 소진의 눈, 그 입술에 도오루의 드거운 입술이 덥 친다.
감긴 두 눈에서 새삼 방울지는 소진.
그 눈까풀 위로 도오루의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O·L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에는 어둠이 깔려있다.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소진의 눈
스케치 되고 있는 소진의 눈, 눈, 눈!
냉혹하리만치 차게 빛나는 도오루의 눈.
방바닥에 흐터진 스케치의 자취들.
긴 목덜미와 프로필의 가지가지
도오루의 눈.
홍은원 시나리로의 정점에 피어난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
영화제작의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여성 영화감독 홍은원은 많지 않은 작품을 남기고서도 시네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라야 하는 것은 여성들의 진솔한 자기희생을 작고 아름다운 저항으로 일관되게 그려왔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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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에서 시네아티스트 홍은원에게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오직 영화감독의 영역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를 겸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영화예술은 영상으로 자신의 사상이나 내면의식을 그려가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시나리오에 의해서 작업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하는 것은 세계가 공통된다. 좋은 시나리오의 조건으로는 강렬한 주제의식(主題意識)이 거론되고, 짜임새 있는 드라마투르기가 있어야 한다고들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인간탐구(人間探求)일 것이다.
시네아티스트 홍은원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여성들의 이야기, 특히 전통적인 인습에 시달리는 한국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인 모순점의 개선에 도전하였다. 아니 그러한 모순점에 저항(抵抗)하는 여성상을 그리면서도 거창한 주제를 내세우거나, 투쟁적인 개념의 영화를 쓰고(시나리오) 만든(연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었던 시대에 걸맞게 소리없이 소임을 다한 시네아티스트였다.
지금까지 홍은원의 영화정신을 살피면서 그녀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한국 여성들의 삶이 그러했던 것 처럼 , 시네아티스트 홍은원의 아름다운 저항도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영화정신은 또 다른 후학(여성)들에 의하여 맥맥히 이어져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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