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로서 천부적 재능, 열정, 노력, 극기, 조정 능력과 함께, 영화는 막대한 자본과 여러 사람의 힘과 재능이 합쳐져야 하는 만큼, 강한 리더십과 인화의 묘를 살릴 수 있는 부드러운 성격까지 겸비할 수 있는 감독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성영화인들에게 그런 자리는 쉽게 제공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마치 여성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 성악가는 적지 않지만 여성 지휘자가 드문 것과 일맥상통한다. 앞서와 같은 능력이 과연 여성에게 있다는 데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 여성이 감독이 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뚫고 들어가기처럼 그것은 온갖 어려움을 동반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성에게도 전체를 조감하는 능력, 통솔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에 대해서 여러 해 동안 영화계에서 경험을 쌓은 홍은원은 분명 분개했을 것이다.
홍은원 감독은 최인규 감독의 <죄 없는 죄인>(1947)의 기록을 시작으로 <유정무정>(1959) <젊은 설계도>(1960) <황혼>(1960) <바위고개>(1960) 등의 시나리오를 썼고 이강천, 전창근, 유두연, 윤봉춘 등의 조감독을 거치면서 해방된 한국의 초창기 영화사의 증인으로서 능력을 쌓아간, 정식 코스를 거친 감독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녀에게 감독으로서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그것은 고난에 찬 것이었다. 한국에서 여성감독 되기와 여성감독으로서 살아남기의 어려움을 그녀는 자신이 남긴 글들을 통해서 피력하고 있다.
결혼생활 5년 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10년 넘어 연출부의 일을 했다면 감독에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해도 그리 당돌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지. 그러나 나는 여자, 박남옥의 선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제작을 스스로 겸했다는 강점이--약점도 되었지만--있었고 역시 나의 케이스에서는 하나의 모험을 제작자가 감행했다고 해야 할지, 자금 사정의 빈약으로 몇 고비의 중단, 돈 들어가는 장면은 삭제, OL 정도로 넘어가면서 겨우겨우 완성, 물론 산고에 비해 초라한 작품이 되었을 수밖에. (홍은원, '한국의 여류영화감독들: 한국은 여류영화감독의 선진국', 격월간 영화 1981, 1/2월)
따라서 그런 그녀에게 <여판사>라는 작품은 데뷔작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통해서 "여자를 그리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판사>를 비롯해서, 이 한국영화사의 두번째 여성감독의 소중한 영화작품들은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감독으로서의 홍은원과 그녀의 작업은 이제 시나리오와 몇 개의 신문이나 잡지기사의 자료,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는 많은 영화인들의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그 작품의 흔적 찾기를 통한 유추와 재구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판사>(1962)
우여곡절 끝에 감독이 된 홍은원에게 1962년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여판사>는 그녀의 잠재력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감독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영화감독으로서의 홍은원을 제한하는 중요한 요소였지만 한국관객들, 그것도 여성관객들에게 영화가 대중문화의 총아로 떠오르면서 막 한국영화사의 전성기를 시작하던 시기에 <여판사>는 참신한 홍보에 분명 효과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즉 비록 그녀가 16년 동안이나 영화계에서 갈고 닦은 실력에 의해 데뷔했다고 하지만 그녀의 데뷔에는 다소 상업적인 계산이 개입했을 것이다.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여판사의 죽음을 바탕으로 쓰여진 각본이 '홍일점 여판사에 홍일점 여감독'이라는 선전효과로 화제를 일으켜 보자는 제작자의 심산이 작용하여 제작되었다는 것(홍은원, 「여류영화감독의 비애」, [세대] 1976년 1월호, 336쪽)으로 보아 '여성'은 때로는 그 희소성으로 인해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홍은원 감독은 대본을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는 조건으로 연출을 수락했다고 한다. 주인공인 문정숙의 얼굴이 크게 확대된 신문광고는 "한국의 홍일점인 여감독 홍은원 연출"이 오른편에, 그리고 다시 한번 왼쪽에 "여감독 홍은원"을 강조함으로써 여성감독으로서의 홍은원의 위치를 알려준다. "직업여성부부의 이상심리!"라는 광고카피를 내세운 같은 영화의 또다른 광고에서도 "여감독 홍은원"은 강조되고 있다. 당시 이 영화에 대한 신문의 소개는 "내용은 여감독이 다룰 만한 소재로 여성의 직장과 가정의 양립문제로 결국 홈드라마지만 하나의 사회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밝힌다. 여감독다운 섬세한 플롯의 전개에다 명확한 커팅은 몇 사람의 중견감독을 조감독으로서 오히려 길러낸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사실 <여판사>를 연출하기까지 그녀가 한국 관객들에게 갖고 있던 불만도 상당해 보인다. "우리 영화의 수준이 제자리걸음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까닭은 물론 영화인들 자신의 탓이지만 한편으론 관객들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요"( )라고 밝힌 홍은원은 시시하고 저속한 신파조 영화류가 관객들의 불신과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감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국산영화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도 팬들의 기탄 없는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여자를 그리고 싶다"고 한 이 영화는 "남편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아내가 판사라는 직업과 가정과의 사이에서 겪는 고통과 불행을 다룬 작품이라는데 어쩌면 통속적이고 인순 고식적 결론밖엔 별로 내릴 수 없는 여성의 이러한 딜레마를 어떻게 해부하여 보여줄 것인지, '여감독'이 만들어내는 <여판사>가 '여관객'에게 기대되는 바가 크다"(한국일보 1962년 6월 29일 자)고 밝히고 있듯이 여성 관객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른 현대적인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추식의 시나리오를 보면 <여판사>에는 노망한 할머니, 며느리만을 사랑하는 시아버지, 전남편의 아들을 숨기고 있는 계모인 시어머니와 시누이, 자격지심이 강한 남편, 남편을 따르는 순진한 처녀 등이 며느리/아내인 여판사의 주변인물로 등장한다. "어떤 모델을 두고 그린 이야기 같지만 보고 있노라면 선입관과 달리 반전되는 이야기에 호감이 간다."( )는 당시의 평가처럼, 이 영화는 할머니, 계모, 시아버지, 남편, 시누이 그리고 여판사 자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간으로 그린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것은 이들이 모두 헛된 욕심에 사로잡히거나 질투에 사로잡히고 자격지심에 실수를 하며 남이 잘 되는 꼴에 배아파하는 속좁은,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가슴 아파하기도 하는 특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이자 여판사인 진숙에게 보이는 태도는 편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동시에 전남편의 아들을 가족들에게 숨기는 애닯은 모성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계모라면 예나 지금이나 「콩쥐팥쥐」 혹은 「장화홍련전」의 다른 판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 영화는 나름대로의 자의식을 가지고 접근하며 그것에 도전한다. 그 뿐만 아니다. 피아노를 갖고 싶어하는 시누이 금원은 오빠의 결혼에 아버지가 개입하는 것을 문제 삼는 현대여성을 자처하면서도 여판사인 올케에게 오빠를 잘 돌보라고 훈수하며 '여필종부'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여성들 스스로 전근대와 근대 사이에서 방황하며 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순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는 데는 어느 한 사람에게 동일시하기보다는 다중적 시선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딸이자 애인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인 '여판사'에 대해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과 사회라는 공적 공간이 보이는 태도를 꼼꼼하게 천착해간 것이다. "섬세하고도 민감한 여성의 감각으로 당당히 맞서 나가는 품", "남편보다 우월 의식을 가진 직장여성을 그려보겠다고 한다. 여성만이 알고 있는 여성의 심리와 남성의 관찰을 영상화하겠다는 의욕."(「62년의 제1선 여감독 홍은원」, 동아일보 1962년 7월 1일)이라고 기사화된 것으로 보아 이 영화는 더 이상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만 머물지 않게 된 여성의 다양한 위치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는 것이다. 여성의 직장과 가정의 양립문제라는, 예나 지금이나 반복되고 있는 문제는 복잡한 가족관계와 얽히면서 더욱 첨예하게 다루어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귀어왔으나 여주인공인 진숙(문정숙 분)이 여판사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다가 헤어지고마는 의사인 애인 동훈, 아버지의 권유에 못이겨 진숙과 결혼했지만 자기 일에 열중하는 아내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남편 규식을 통해서 여성에게 있어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가정이라는 전제에 남성들이 얼마나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동시에 변화하는 사회에서 이에 대한 남성들의 저항이 얼마나 완강했는지, 그리고 남성들의 불안과 공포가 얼마나 거셌는지를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또 친구랍시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충동질하는 규식의 친구들은 또 얼마나 규식을 작아지게 하는가?
하지만 홍은원 감독이 단지 세 편(<여판사> <홀어머니> <오해가 남긴 모든 것>을 연출하고 이후에는 시나리오 쓰는 것만으로 자족해야 했던 것처럼 <여판사>의 주인공인 진숙도 자신의 직업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자신의 일이 가정에 풍파를 만들고 판사라는 직업이 온갖 청탁에 가족들까지 끌어들이게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어렵게 얻은 자신의 일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는 일을 그냥 포기한 것이 아니라 망령난 시할머니의 우연한 죽음에 애꿎게 범인으로 몰린 시어머니를 변호하기 위해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다시 나서게 됨으로써 가정 일의 해결사로 나섰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연 현실과의 타협일까, 투항일까? 여성이라는 그녀의 조건이 그녀를 끊임없이 벼랑으로 몰고 갔지만 자신을 포함한 많은 여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으로 2보 후퇴를 통해서 1보 전진하려 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 역시 여성이 머물 곳은 우선 가정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그녀의 선택이 갖는 이중적인 의미를 되새겨봐야 할지 모른다. 어쨌든 가족을 중심에 두고 봉합한 영화의 결말에서 보듯이 진숙의 결단은 대단히 논쟁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해서 "결국 홈드라마지만 하나의 사회문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당시의 기사는 이제 "결국 사회문제를 제시하고 있지만 홈드라마이다"라는 말로 바뀌어야할지 모른다. 하지만 "법정장면 등 고증을 잘 했고(당시 가정법원 판사였던 권영순 판사의 도움을 받아) 문정숙, 유계선이 호연하였으며 하이클라스의 홈 드라마인데 지나친 선의감 때문에 대단원이 약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는 당시의 기대 역시 "인정극으로 흐르기보다는" 여판사가 훨씬 더 주체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란 게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노정에 있던 그 시대 여성의 초상화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모든 것>(1965)
"모정의 바다 사랑의 풍설을 끝없는 감동을 부르는 홍루의 명편"이라는 광고로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홀어머니>는 시네마스코프로 아세아극장에서 개봉되었는데 그 제작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음은 홍은원감독이 60년대 어려웠던 촬영현장에 대한 너무도 어이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는 한 대목이다.
이런 작품가운데 제 2작인 <홀어머니> 촬영시의 현장 이야기---촬영 3분의 2선이 힘겹게 넘어갔을 무렵 옴짝달싹 못하는 자금난에 봉착, 거의 재개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스태프들도, 뿔뿔이 흩어져 떠난 1년 몇 개월 후, 기적적으로 촬영재개의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선반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누렇게 바랜 기록대장과 콘티 뭉치가 내려지고 더러 얼굴은 바뀌었지만 뒷 스태프들이 웅성웅성 모여들고 사무실은 활기를 되찾았다. 그 당시에는 하늘의 별따기 정도로 어려웠던 주연자들의 스케쥴도 그럭저럭 잡혔다. (중략) 자, 이제는 마지막 장소로 <홀어머니>의 집앞 야간 촬영만 남았다.
수십 킬로와트 조명기를 싣고 선발대로 조연출 1명과 기사진이 떠났다. 그런데 얼마후 사무실로 걸려온 조감독이 하는 말, 감독님 저어 홀어머니의 집이 없어졌어요!
집이 없어지다니! 집이 없어지다니! 70년대 들어서는 자고나면 빌딩이 하나씩 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1960년대 초에는 이 말이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무위로 흘러간 1년 몇 개월 사이에 그 자리에 버젓한 3층 건물이 서있었던 것이다.
천변(川邊)을 낀 홀어머니의 재봉공장이자 일가의 보금자리였던 집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이미 찍어놓은 세트와 낮에 찍은 집밖의 연결은 어떻게 하나. 그렇다고 클라이막스로 이어지는 그 장면을 또다시 삭제하는 수도 없고, 어찌됐건 연기자 제너레이터 야식 모든 것이 취소되고 그 날밤의 스케쥴은 펑크가 났다. 그리고 얼마후 세트부에서는 단 일면짜리(출입문과 벽과 창으로 된) 홀어머니의 집 대문밖 세트를 川邊가 어느 집 앞에 세웠다.
홍은원, '영화인 現場에세이', 격 [월간 영화], 1980년 9/10월 호 110-111쪽
조미령, 신성일, 방성자, 최지희, 김승호가 등장했던 이 영화는 홍은원 감독의 다음 작품인 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김지미 주연의 <오해가 남긴 것>과 함께 그의 영화작업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었으며 여성감독으로서의 그의 자의식이 얼마나 철저했는지의 정황을 잘 보여준다.
감독 자신이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를 둔 탓에홀어머니가 중심이 된 가정이 절대 낯설지 않았을 홍은원 감독은 한국전쟁 직후 과부와 그가 직면한 현실을 <홀어머니>를 통해 드러낸다. 단란하던 가정에 들이닥친 전쟁으로 인한 남편의 죽음, 재봉틀을 돌리며 생계를 유지하던 가정을 얽어맨 사기와 경제적 어려움, 하지만 현재의 그녀가 "참고 견디어온 눈매에 이슬이 맺히더니 통곡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니다. 고생 끝에 잘난 큰아들을 둔 덕에 부잣집 딸을 며느리로 맞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유한마담들과 어울리는 며느리의 오만불손함과 이로 인한 큰아들 부부의 가정파탄은 그녀의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차분하고 규모 있는 생활을 냉소하며 제 멋에 살던 귀염둥이 딸이 '미국 친구'와 어울리다 양공주로 팔려 "무수한 남자들에게 짓밟힌 끝에 미군부대 철조망 그늘의 산송장"이 되어버렸고 이런 여동생을 구하러간 둘째 아들이 문제의 그 미국 친구를 죽였다는 누명으로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것이다. 호강을 바라기보다는 그저 먹을 걱정 없이 가족끼리 오순도순 비둘기처럼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던 홀어머니 현숙(조미령 분)의 꿈은 "장남으로서 보란 듯이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리겠다"는 야망의 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추악해져야 돈이 벌리는 거라면 흙탕물 속에라도 몸을 던지는" 자식들의 허영심과 무모함으로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만다.
하지만 제목이 이미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듯이 <홀어머니>는 똑같이 과부를 다루면서도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미망인>이 당시 사회문제화되었던 전쟁과부 문제를 다루면서도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 선 여성들의 성적 욕망에 초점을 맞추면서 모성과 여성의 욕망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면 <홀어머니>에서는 현숙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안빈(김승호 분)이라는 중년신사가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현숙은 이 영화에서 어질고 맑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제한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직후 50년대 중반이라는, <미망인>을 배태했던 암울하던 50년대를 지나 '근대화'의 돌풍이 서민들의 삶의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구악의 일소와 근면, 성실을 내걸었던 60년대 초반에 나옴직한 여성상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홀어머니'의 지고지순한 태도는 상처는 입었지만 결국에는 원했던 대로 자식들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이다. 이것은 구질구질한 여성의 삶에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산뜻한 처리를 선호하던 홍은원 감독의 작업 스타일과 만나면서 김석민 원작의 시나리오는 홍은원에 의해서 깔끔하게 각색되었고 아마도 이것은 영화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홍은원 감독의 영화에서 선과 악의 구분에 따른 감정의 과잉을 찾기가 어려운 것처럼 악한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를테면 <홀어머니>에서 무거래수표로 재봉틀을 인수하여 현숙을 경제적 파탄에 빠뜨렸던 사기범도 사실은 가정적 어려움 때문에 그랬던 것이며 결국은 현숙의 어려움을 다름 방식으로 도와주며 현숙을 무시했던 잘난 며느리 역시 회개하며 나타난다. 즉 그의 영화에서 악은 본질적이라기보다는 환경적, 상황적인 것이며 그 사람의 처지로 입장을 바꾸어보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이것은 <오해가 남긴 것>의 주인공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본연의 자세를 살리고 인간의 대열에 서려고 하나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아픈 상채기 속에 죽어가는 현상을 예리하게" 처리한 <오해가 남긴 것>에서의 여주인공 윤옥(김지미 분)은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애인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여성이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몸뚱아리 하나밖에는 가진 것 없는 낯선 서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일자리는 '식모살이'고 이보다 좀더 나는 수입과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성직업은 술집의 '바걸'이나 '기생'이다. 영화는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사연과 그들의 꿈과 그들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이들의 직업은 어디까지나 가족들에게는 비밀이며 그것이 알려지는 순간 이들의 삶은 이전보다 더욱 뒤틀린다. 가족이거나 애인이거나 이들에게 신세를 졌던 사람들은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런 돈을 벌게 하면서 자신이 공부를 했다는 데서 미안함과 죄의식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런 떳떳치 못한 돈으로 공부를 했다는 점에 대해서 자신과 상대방을 능멸하는 것이다.
<오해가 남긴 것>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주인공들의 상황이 빚어내는 아이러니에 많은 것을 할애하고 있다. 윤옥의 여동생 강희는 언니 덕분에 여고에 이어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유학을 왔으나 언니가 서울의 큰 회사에 다닌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언니가 다니는 '유락원'을 경영하는 엄마를 둔 친구 경자로 인해 깨지면서 언니에 대한 신뢰감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가 언니만이 그렇게 돈을 벌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언니가 '유락원'의 기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비어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자학적인 행위에 머무른다. 아니 최소한 모든 것을 희생해온 윤옥에게 그것은 고통이 된다. 왜냐하면 윤옥에게 현재의 희생의 몫은 철저히 자신만의 것이며 그녀의 현재는 자신이 헌신했던 존재들의 성공에 의해서 결국은 보상받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옥이 학비를 대고 유학자금을 마련해주고 결혼을 약속한 애인 상준이 유학 후 돌아와 그녀의 평판에 실망하여 이별을 선언하고 더구나 여동생 강희와 사귈 때 윤옥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윤옥의 현재는 미래에 저당잡혀 있고 그 미래가 사라질 때 그녀의 현재의 삶의 의미는 한없이 퇴색되기 때문이다.
물론 상준과 강희가 윤옥을 중심으로 얽히는 것이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거꾸로 그것은 극적 통렬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윤옥의 자살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 된다. 문제는 그녀의 애인인 상준이 그녀의 직업을 모르지 않았으며 유혹이 많은 직업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도 그녀의 희생으로 자신의 영달을 꾀했으면서도 결국은 세상의 선입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실을 놓친다는 데 이 영화의 가장 큰 아이러니가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은 눈이 있으되 진실을 보지 못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현상의 뒷면인 진실을 놓치고 왜곡한 오이디푸스왕으로부터 이어지는 수많은 남성주체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더구나 자신의 명예는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기다려온 애인의 명예는 생각하지 않는 상준에 대해서 많은 여성관객이 분노의 눈물을 흘렸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이 어떤 노동이 되었건 감수해야했던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한편으로는 국가를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오빠와 남동생, 나아가 가족을 위해서 희생했던 1960년대 당시의 현실에 대한 투영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60년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70년대 말에 절정을 이룬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들'과는 다르다. 여성의 불행한 운명을 다룬 많은 영화들이 여성의 불행을 남성들에게 유린당하는 역사를 통해서 과도한 과잉으로 치닫는 묘사방법을 택했다면, 그래서 관객이 그녀의 불행에 몸서리치면서 여성이라는 기호가 요구하는 운명에 순응하도록 요구받았다면 6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훨씬 차갑고 건조하게 현실과 대면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자기감상에 빠진 70년대 남성주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은 윤옥의 시선에서 살아남은 남성(들)과 혜택받은 여성들을 바라보게 한다. 뿐만 아니라 기생인 각각의 여성들이 각자 위치에서 서로 이해하고 도우며 자신의 인생을 누리는 장면들은 훨씬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다. 여성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도구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은 홍은원 감독 스스로 여성으로서 삶의 현장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경험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홍은원은 환갑이 지나서도 다람쥐처럼 영화판을 누비고 다닐 것"이라는 유두연 감독의 예견과 달리 그가 "환갑은커녕 50도 못되어 영화계라는 태양을 맴도는 위성의 존재로 떨어졌다"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는 것(홍은원, 「여류영화감독의 비애」,『세대』1976, 1월, p.338)은 감독으로서 일가를 이루고 싶은 야망이 컸던 그에게 이후의 영화계 생활이 고통의 시간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시나리오 쓰기를 누구보다도 즐겼고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일에만 머무른다는 것이 그녀의 재능으로 보아 결코 충분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영화사와 감독의 손에 의해 윤색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 작업에 대해서 언제나 부끄러워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그를 계속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뒷 스태프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여성영화인들의 언니로, 내면 표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에 '햄릿'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홍은원 감독은 척박한 한반도에 태어난 근대여성의 삶과 궤를 같이한 '세기를 앞서간 여성'의 면모를 보인다.
이제 '홍일점 시대'에 등장하여 화제를 모았던, 하지만 너무도 짧게 불꽃처럼 산화하고만 여성감독 홍은원도, 그리고 그의 극적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여판사>로 열연했던 문정숙도 더 이상 여기에 없다. 하지만 현재 가장 안타까운 일은 60년대 초반에 피어나서 그동안 쌓은 역량을 유감없이 펼치고자 했던 홍은원 감독의 영화들을 세 편 모두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70년대 언젠가 <여판사>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는 것만 전설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어딘가 필름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무성한 가운데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던 여성감독이 자신의 작품에 새겨넣었을 목소리를 시나리오와 문헌자료만으로 이렇게 불러내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한국영화사에 뚜렷하게 각인되어야 할 이 또 한 사람의 여성감독 홍은원의 복원작업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따라서 1960년대 길목에 선 여성들의 삶과 고뇌 그리고 성취감에 들떠 활약하던 모습이 육화된 필름들을 확인하게 될 그 언젠가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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