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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나리오_7) 피안의 연인(1975-1977)

2023-11-25 조회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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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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配役 李 素殄 20-24-50 女流小說家
白石 徹 (시라이시·도오루) 29-33 畵家
白石 素玉(시라이시·스다마) 20 徹의 딸
朴 美淑 21-25-54 素殄의 친구
金 基哲 25 素殄의 아들
柳 柄植 26 美淑의 남편
素殄母 尹氏
嚴 周一 基哲의 친구
그 妻
周一의 曾祖母
周一의 여동생
周一의 남동생
日本人 局長
日本女人 徹의 女人
日本人 記者
밤의 女人 A-B
鄭尙勳 徹의 同僚
보이. 少年. 꼬마
刑事 A·B
찬가게 주인
靑年
其他 엑스트라 多數

#1 서울시가 (부감)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
고층건물과 하이웨이가
직선과 선을 그리고 있다
김포공항이 다가온다.

#2. 김포공항
착륙된 비행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관광객들
그 거의 모두가 일본인들이다.

#3 서울의 고적
경복궁의 이모저모
창덕궁
비원
창경원
종묘
국립묘지
옛 조선총독부를 배경으로 한 광화문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타이틀―
#4 삭제
#5 T호텔 앞
일본인 관광객들을 가득 싣고 버스가 와서 닿는다.
쏟아지는 일본인들 거의 모두가 앞에 카메라를 매달고 싱글벙글
사십대의 사나이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싱글벙글
사나이 (아래 대사가 일본말로 있고...워드를 못 쳤음)
내는 이분에 온게 네 번째라요.
한국의 기생파티 한분 맛보이 영판 안잊히는기라.
주말만 됬다카믄 온 몸이 근질근질 견딜수가 없다아입니까.
헤헤헤… 잘 알끼로구마… 그람 실례하요 내 조께 바빠서…
사나이 바쁘게 동행의 뒤를 딸아 호텔 현관으로 들어간다.
그 현관에서 죽 카메라 훑어 올라가 10여층 위의 어느 창문을 잡는다.

#6 삭제
#7 호텔 방
창가에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라이시·스다마(白石素玉 20)
쇼트·컬 머리의 사슴과 같은 청초한 소녀다.
감회 깊게 서울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하늘로 시선을 올리며
소옥 파파! 한국에 왔어요. 파파가 말한대로 하늘이 참 푸르네요…
검은 눈에 아롱지는 슬픔.
노크소리―
소옥 (얼른 표정을 고치며) 네―
문이 열리고 보이 들어선다.
보이 부르셨습니까?
소옥 아 네 좀 부탁이 있어서…
테이블 앞으로 가 핸드백에서 종이쪽지를 꺼내며
소옥 미안하지만 이분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좀 알았으면 해요…
보이 (받아서 보며) 이 소진씨… 뭘 하는 분인가요?
#8 이소진의 아파트 서재
온통 책으로 뒤엎인 벽면
테이블 위에는 차곡히 정리된 원고가 싸여있고
밑으로는 휴지화된 원고지가 서너장 흐트러져 있다.
홈웨어의 긴 치마자락을 스치며 들어서는 여인의 발
커피잔을 들고 들어와 피로한 듯 소파에 몸을 묻는 소진(53)
지성의 아름다움을 느끼게하는 여인이다.
잔을 들어 한모금의 커피를 음미하듯 마신다.
그리고 눈에 거슬리는 듯 일어나 흐트러진 원고지를 줏어 휴지통에 넣는데―
전화벨―
#9 소진의 거실
소진이 나와 수화기를 든다.
소진 여보세요…… 네 이소진입니다.…… 아 미스 유… 네 되있어요.
밤을 샜지 뭐…… 그럼 아무때구 좋아요……
네? 가족사진? (웃으며) 가족이래야 아들아이 하나하구 나뿐인걸……
호호…어떡하지 난 뭐 괜찮은데 우리 아이가 질색을 한답니다.……
글쎄요 자신이 없군요 워낙 고집이 세고 제 멋대로라서……
네 원고는 틀림없이 오전중에 내다드리죠
전화를 끊고 창가로가 심호흡을 한다.
#10 강변
내려다보이는 강변과 강변도로
#11 소진의 거실
도어 소리에 소진이 돌아본다.
한쪽 방에서 소진의 아들 기철(25)이 나온다.
소진 (웃으며) 아이구, 우리 설계사 아드님 일주일분 잠 다 주무셨나?
기철 더 잘건데 엄마가 전화로 내 중상모략하는 바람에 일어난 거야
소진 얘 말은 바른대로 해. 잡지에 가족사진 실린것처럼 유치졸열한 건
없다구는 누가 했지?
기철 핫하하― 그랬구나? 사실은 엄마 밤샌 것 같아서 커피 끓여주려구…
소진 (웃으며) 효자구만! 입에 침이나 바르시지
기철 어이 배고프다! 엄마 빨리 먹을 것 좀 채려줘!
빨리 먹구 열한시에 나 친구 만나러 가야돼는데"
소진 호호 이제야 본심이 나오는구나
기철은 세면소로 들어가고 소진은 키친으로 가려는데
부자 소리―
소진 현관 쪽으로 오며
소진 누구세요?
하고 문 구멍으로 내다 본다.
#12 소진의 현관 밖
지나치게 야한 옷차림의 젊은 여자 둘이 서 있다.(밤의 여인)
여인A 저어 503호에 사는 사람이예요
문이 열리고 소진이 내다보며
소진 네에 근데 어쩐일루…?
여인B (껌을 질겅질겅) 뭣 좀 물어보구 부탁할 게 좀 있어서
소진 무슨 부탁이신가
여인B 좀 들어가두 되죠?
소진 아직 치두지도 못했는데…
여인A 아이 어때요
소진의 의사에는 아랑곳 없이 들어선다.
소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두 여인을 안내해 의자를 권하며
소진 앉으시지
여인A 실례해요
둘이 앉자 소진도 앉는다.
여인B 아드님은 어디 나갔어요?
소진 우리 아들 아일 찾아왔나요?
여인B (킥킥 웃으며) 그런건 아니지만 (A에게) 이왕이면 그지?
여인A 어이 주책!
소진 (차갑게) 용건이 뭐죠?
여인A 아줌마 일본말 잘 하시죠?
소진 별안간 일본말은 왜요?
여인A 편지 몇 통 써주실래요?
여인B 이런 병태! 몇 통씩 무슨 필요가 있니 한통가지구 이름만 바꾸면 되지
소진 …… (기막힌 듯)
여인B (아랑곳 없이) 우리두 일본말은 꽤 하는 편인데 연애편지는 좀 서툴거든요
#13 세면소
얼굴에 잔뜩 비누를 묻힌 기철이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맊으로 돌린다.
소진(E) 글쎄요. 좀 곤란한 부탁이군요
여인B(E) 아이 거저 써 달래나요 뭐. 편지 값은 두둑히 드린다구요.
달콤하게 근사하게만 써주세요
기철 저게!! 뭐 저런것들이 다 있어
하며 성이 나서 뛰어나가려다 파자마 바람인 것을 알고 멈칫한다.
#14 소진의 거실
핼쓱해지는 소진의 얼굴에 차가운 빛이 돌며
소진 잘못 찾아 왔군요. 난 연애편지 대서업자는 아닙니다
기철(E) 알아들었으면 고만 가주시오
여인 A·B 뻥해가지고 일어선다.
여인A 그러게 내가 뭐랬어!
여인B 에게게 누가 헐소린지 모르겠네
투덜대며 둘은 인사도 없이 나간다.
기철 세면소에서 나오며
기철 아쭈 엄마 오늘은 거절정신 결핍증에서 멋있게 벗어나든뎁쇼
한마디만 더하면 파자마바람에 뛰어나와서 내쫓을려구 했드니
소진 먹구살자구 하는 일이겠지만 한심한 여자들도 다 있구나…
일어나 키친으로 가는 소진
#15 호텔 방
소옥은 소파에 앉아 한권의 노트를 뒤적이고 있다.
노크 소리―
소옥 (얼굴을 들며) 네에
먼저번 그 보이가 종이쪽지를 들고 들어선다.
보이 손님이 말씀하신 이소진씨 댁 주소와 전화번호 여기 있습니다.
소옥 (받으며) 고마워요
보이 나가려하자
소옥 잠깐! (백에서 팁을 꺼내준다.)
보이 감사합니다.
보이 나가고 소옥은 잠시 감개무량한 듯 쪽지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전화 앞으로 다가선다.

#16 소진의 거실
미숙(54)이 거실의 청소를 하고 있다.
전화 벨―
미숙 (받으며) 네 이소진씨 댁입니다.…
지금 출타중이신데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네?
시라이시 상? ( 순간 스치는 쇼크)
교토에서… 네에 (시계를 보며) 이제 돌아오실 시간은 됬는데요……
아니예요. 어떤 용건이신지 제게 말씀하셔두 됩니다.……
뵈러 오시겠다구요. 넉넉잡구 2시면 틀림 없이 계실겁니다.
네…… 네 그럼
수화기를 놓고 잠시 고개를 심각하게 갸우뚱하는 미숙
현관에서 찰깍 키 소리가 나고
소진 들어선다.
미숙 (반기며) 벌써 오는구만
소진 별일 없었지?(올라서며)
아이구 또 빨래랑 잔뜩 했구나?(살짝 흘기며)
테라스에 널려진 빨래가 바람에 나부낀다.
소진(E) 정말 그러지 말아줘 제발
미숙(E) 괜찮아요 널 돕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즐거운 일이니까.
소진 허지만 내가 미안하잖아
미숙 참 이것봐. 지금 방금 말야
시라이시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
소진 (놀란 듯) 시라이시?
미숙 음 그런데 아주 젊은 여자 목소리야. 교또에서 왔다나
소진 교토…… 알만한 사람이 없는데…
미숙 널 만나러 오겠다구 하길래 선뜻 오라구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시라이시라는 바람에 나까지 괜히 충격을 받았지 뭐야
소진은 조용히 창가에 가서 선다.
미숙 (다가가며) 교포가 아닐까? 상당히 유창한 한국말 하던데
소진의 갈피잃은 눈길
소진 응? … 아 아니야!
미숙 2시에 온댔어 (시계를 돌아보고)
30분 남았는데… 그 동안 누어서 쉬렴
하며 긴 의자의 쿠션을 다독거린다.
그냥 창 앞에 서있는 소진
목이 긴 뒷덜미―
창가의 백합꽃과 조화를 이룬다.

#17 아파트 계단과 현관 밖
한발 한발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옥.
소진이 방 앞에 이르러 잠깐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누른다.
#18 소진의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소진 깜짝 놀란 듯 뒤돌아 본다.
시계는 2시 정각
키친에서 미숙이 달려나온다.
미숙 왔나 보지?
문을 연다.
긴장한 얼굴의 소옥이 가련하게 서있다.
소옥 저어… 아까 전화 한…
미숙 네에. 어서 오세요. 이분이 이소진씨랍니다.
소진의 얼굴―
소옥의 얼굴―
두 눈길에 서로 무엇인가가 오간다.
소진 (걸어 나와 맞으며) 어서 들어오세요. 기다렸습니다.
올라서는 소옥을 안내해 자리를 권하고 미진한 듯 키친 쪽으로 가는 미숙
소옥 ……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소진 …… ( 기대와 의아심이 교차한다.)
소옥 (이윽고 입을 열어) 이렇게 알지 못할 소녀가 찾아와서 놀라셨죠?
소진 (다정히) 네. 조금은.
소옥 그런데 전 선생님을 뵙는 순간
아주 어려서부터 아는 얼굴을 대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일렁이는 동요를 억제하려고 애쓰는 소진
소옥 선생님 시라이시·도오루란 사람을 혹시 기억하실 수 있으세요?
소진 그저 담담하게 끄떡이려고 하나 손끝에서는 경련이 일고 있다.
소옥 아아 고마워라! 그 분의 딸이예요
소진 네! (숨을 몰아쉰다.)
소옥 제 이름은 스다마…… 한국말 발음으로 그냥 소옥이라구 불러주세요
소진의 감동어린 눈길
소옥 이년 전 파파한테서 너무나 아름다운 얘기를 들었어요.
주인공은 바로 파파와 이소진 선생님……
하지만 파파는 너무 옛 이야기라 선생님은 이미 잊으셨을 거라고 하셨어요
소진 (혼자 불러보듯) 소옥이…
소옥 네 역시 그 때 제 이름이 선생님에게서 유래된 것을 알았죠……
(무언가 생각난 듯 방긋이 미소띠며) 파파는 잊으셨을 거라고 했지만
전 선생님이 꼭 기억하구 계실거라구 했어요.
우린 여잔데요. 그렇죠 선생님
소진 맞았어요. 우린 여잔데요
정 깊은 미소로 끄덕이는 소진
미숙이 차를 날라온다.
소진 미숙아 시라이시상 따님이였어
미숙 (감동적으로) 어쩜!
소옥 (약간 어리둥절) 아주머니두 우리 파파 아세요?
미숙 아다마다요. 이 사람 보다두 내가 더 먼저 알고 있었는걸요
앉아서 차 시중을 든다.
소옥 아이. 저 너무너무 기뻐요
눈물이 글썽해지는 소옥
미숙 근데 아가씨 지금 몇살?
소옥 인제 몇일 있으면 스무살 되요
소진 어쩌면… 그때 내가 바로 스무살이었어요
미숙 그래 아버님 안녕하세요?
소옥 (얼굴이 이그러지며) 파파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눈이 많이 오는 밤에…
창백해지는 소진의 얼굴
#19 株式會社 丸善(마루젱) 京城支店
2층 서적부
계단을 막 올라서는 검은 베레모의 시라이시·도오루(29)
한적한 가게 한쪽에서 단행본을 읽고있던 소진(20) 고개를 든다
전류가 흐르는 듯 숨을 몰아쉬며 그 쪽을 응시하는 소진
원서로 메워진 코너를 살피고 있는 도오루의 조각 같은 차가운 옆 얼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섰는 소진
도오루 주섬주섬 몇권의 책을 들고
소진 앞으로 다가온다
소진 (눈을 그대로 둔채 얼어붙은 듯) 이랏샤이마세!
표정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은채 돈과 책들을 소진 앞에 내민 도오루는
소진이 읽든 책을 흘끗 보고 약간 뜻밖인 표정이 되더니 한국말로
도오루 월간 러시아어 프랑스어 아직 안 왔오?
소진 (당황해 굳어진 표정을 풀며) 네. 아직
포장하는 손 끝이 약간 떨리는 듯―
도오루 李箱을 좋아 하시오?
소진 (놀란 듯 고개를 들며) 네?…… 네
하고 읽던 책에 눈길이 간다.

소진이 내미는 포장된 책을 받아들고 도오루는 여전히 차디찬 표정으로 돌아서서
가려고 한다.
소진 고맙습니다……아 저어!
돌아보는 도오루
소진 몇일 안에 올거예요. 연락처를 말씀해 주시면 통지해 드리겠어요
하며 주문장을 내놓는다.
도오루 힐끗 소진을 바라보고 말없이 주문장에 갈겨쓴다.
그리고 손끝으로 두어번 "여기다가"라는 듯 두들긴다.
정신 없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소진

#20 本町二丁目 거리(一九四0年)
丸善柱式會社 京城支店이라는 간판
막 샷타가 내려지고 있는 저녁무렵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다.
옆 골목에서 종업원들이 二三名씩 퇴근하고 있다.
검은 베레모를 쓴 소진과 젊은날의 미숙(21)도 걸어나온다.
미숙 얘 소진아 우리 무사시노에 가서 차 한잔 마실까?
소진 … 차? 음
미숙 소진의 팔을 이끌고 간다.
#21 다방 무사시노 (武藏野)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소진의 손이 판에 박은 듯 일정한 동작으로 커피를 젓고 있다.
미숙(E) 얘! 소진아 얘
깜짝 놀라 손을 멈추고 바라보는 소진
미숙 너 도대체 요새 왜 그러니
소진 뭘
미숙 뭐가 뭘이야. 말 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인간이 그렇게 변해
소진 내가 변했어?
미숙 마루젱 제일가는 귀염둥이 소녀가 그렇게 우울해지니까 살 맛이 안난다구
호리가와두 그러더라
소진 …… 가끔 있는 조울증이겠지 뭐
(웃으며) 여학교 때 말야 담임선생이 이 반에서 제일 명랑한 애가 누구냐구
물은 일이 있어. 애들이 이소진이라구 했거든. 그럼 제일 우울한 애가
누구냐구 물었어. 역시 이소진이라구 대답하드란 말야.
미숙 아니야 그건 우울증이 아니야. 분명히 뭔가 그리워하는 눈길 그리구……
소진 ……(눈길이 갈피를 잃는다.)
미숙 너 누군가 사랑하구 있지?
소진 대답없이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다.
소진 (이윽고) 너 혹시 백선생님이라구… 아니?
미숙 백 선생? … 아니?
백 선생이 뭐야? 이름이 뭔데
소진 백 석철씨……
미숙 백 석철…… 모르겠는데
소진 XX일보사 편집국에 근무하는 사람이야
우리 가게 단골인가 보든데……
미숙 단골 손님?
XX 일보사라……
하고 한참 생각하는 듯 하드니 갑자기 폭소를 터트린다.
주변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들을 바라본다.
소진 얜 미쳤나봐.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아. 왜 그래
그제야 창피한 듯 약간 기를 죽이고 그래도 우스워 죽겠다는 듯―
만년필을 꺼낸다.
종이 위에 쓰여지는 이름
白石徹
그 종이를 싹 소진 앞으로 돌리며
미숙 이 사람이지?
소진 맞어 백석철씨…
그 이름 위 白石과 徹 사이에 점이 하나 찍힌다.
미숙 (웃으며) 시라이시·도오루! 백선생이 아니라 시라이시 상이야.
그 사람은
소진 뭐? 일본사람이야? 천만에! 난 분명히 조선말루 얘기 했어
미숙 키 크구 마르구 너처럼 까만 베레모를 쓴 귀공자 같은 남자지?
소진 꼭 그래!
미숙 틀림 없어. 시라이시상이야. 그 사람 어학의 천재랜다.
七개국어를 마스터 한다든가
소진 그러구보니 사간 책이 몽땅 원서였어……
미숙 그뿐인줄 아니? 그 사람의 본직…이랄까. 전문분야는 미술이야.
서양화… 그런데 조각 시 못하는게 없대…
대부분 그런 인간이 팔방미인으로 수박 겉핧기식의 잔재주꾼인데
시이라시상은 그게 아니라는거야
신문사에서두 그 사람한테 당해낼 재간이 없다구 두손 든대요
소진 ……
멍해버린 소진의 얼굴에
미숙(E) 소진아 허지만 너 그사람이라면 아예 단념해
소진 (반발하듯) 무슨 뜻이지?
미숙 시라이신 우리 같은 조선 여잔 거들떠 보지두 않는 사람이야
소진 …그럼 혹시 너두 그이를…?
미숙 얜!! 넌 들어온지 얼마 안되서 모르지만 시라이시를 놓고
야마시다, 구보다, 엔도가 얼마나 열을 올린지 아니?
허지만 결국 모두 넘겨다보기만 하다 제물에 나가 떨어졌어……

#22 혼젓한 길
곰곰히 생각에 젖어 걷고 있는 소진
미숙(E) 그 이유는 두 가지야. 시라이시가 워낙 싸늘하게 대꾸도 안했다는 점하구…
또 하나는… 또 하나는…말이지
그렇게 차디찬 그 인간의 실질적인 여자관계는 돈·환이 무색하리만치
복잡했다는 거야
소진아 네가 불행해지지 않을까? 그런 사람 잊어버려!
소진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마냥 걷는다.
소진(E) …잊을 수 있을 것 같잖아…
난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육체에 이끌린게 아니야…
그 사람의 싸늘한 눈길 속에 난 그사람의 고독을 읽었고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고도의 지성을 느꼈어. 마치 전류 처럼…
미숙 그 사람은 일본 사람이라니까…
소진 (뇌까리듯) 일본사람!!… 허지만 난 그 순간 국적을 가릴 여유도 없었어
난 내 나름대로 그 사람을 생각하면 고만인 거야.
그 사람은 몰라두 돼!
스산한 바람이 소진의 머리를 날린다.
#23 마르젱 二층
얼마 안되는 손님이 책을 고르고 있다.
새로 들어온 신간 서적을 정리하고 있는 소진
계단 밟는 소리에 무심코 기대를 걸어본다. 올라온 사람은 소년이다.
실망한 듯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소년이 다가와 엽서와 돈을 내밀며
소년 이 책 찾아오라는 심부름으로 왔는데요
소진 (보고 기가 죽으며) 시라이시상 거군요
소년 네
소진 책을 꺼내 실망한 듯 포장을 한다.
이때 저편에서 일하던 미숙이 쪼르르 다려온다.
미숙 왜 시라이시상이 안 오셨죠?
소년 (의아한 듯 바라보더니) 저어 바쁘신 가봐요
미숙 그럼, 잠간 기다려줘요. 아주 잠깐 응?
소진 (책과 거스름을 주며) 여깄어요. 감사합니다.
소년 책을 받고 미숙 쪽으로 간다.
미숙 뭔가 부지런히 써서 접더니 소년에게 주며 부탁한다는 듯 생끗 웃어보인다.
소년 끄덕이며 받는다.
#24 거리
어둠이 내리깔리는 거리에 첫눈이 나린다.

#25 XX일보사 편집국
도오루가 정신 없이 원고지에 갈겨쓰고 있다.
동료 정상훈이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와
상훈 아직 멀었나?
도오루 응, 다 돼가. 왜? (쳐다보지도 않고)
상훈 왠 왜야. 이 사람아 첫 눈이 내리는데 한잔 안할테야?
도오루 눈이 와? (창을 돌아보고) 좋지, 한잔 하지!
상훈 빨리 빨리 해치워
도오루 알았어!
#26 마루젱 여자 갱의실
미숙이 싱글싱글 웃으며 막 코트를 입고있는 소진에게로 오며
미숙 소진아 너 이 구찌베니 좀 칠해봐라. 얼굴 빛이 왜 그렇게 창백하지?
소진 난 화장품은 도무지 질색야. 얼굴에 덮게가 앉은 것 같아서
미숙 어유 괴물떨긴! 어디 일생 화장 안하구 사나 두구 보자
소진 누가 일생동안 안한데? 늙으면 나두 쪼끔은 화장 할꺼야. 추한건 싫거든
미숙 첫눈이 내리는 저녁 이대루 헤어질 순 없지.
에라 오늘은 내가 저녁 한턱 냈다! (싱글싱글)

#27 쌀롱 보아그랑
눈이 나리는 창 옆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도오루와 상훈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은 "荒城の月"
문이 열리고 미숙이 소진을 이끌고 들어선다.
상훈이 들어서는 미숙에게 슬쩍 윙크한다.
미숙도 웃으며 윙크
상훈 (시침떼고) 아니 처제! 여긴 왠 일이야?
미숙 어머 형부!
돌아 앉았든 도오루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본다.
깜짝 놀라는 소진
미숙 아이 시라이시상두 같이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도오루 안녕하시오?
상훈 모두 아는 사인데, 저 아가씨만 좋다면 우리 합석하는 게 어때
미숙 괜찮아요? (도오루에게)
도오루 좋지
미숙 어때 소진아. 괜찮지?
끌어다 도오루 옆에 앉히고 자기는 상훈 옆에 앉는다.
O. L
어느 정도 무르익은 자리
미숙 그럼 시라이시상은 지금 어느쪽이세요
도오루 나 말이오? 글세… 어쩐지 좀 로맨틱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미숙 (웃으며) 그럼 사랑을 하고 계신거네요
상훈 아 이렇게 어여뿐 아가씨들과 만나고 있지 않아. 첫눈도 내리겠다.
소진 미소할 뿐
도오루 사랑을 느낀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젊었을 때 사랑은 신파 멜로드라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는 싫거든. 그보다두 더 싫은건 구속이야.
사랑두 구속임에는 틀림이 없지.
정착지 없는 배가 그저 항구마다 닻을 내리는 습관처럼
차라리 육체만의 사랑이 훨씬 정신위생상으론 정결하지 않을까.
도오루의 옆얼구을 응시하며 그의 말에서 어느 의미의 공감을 느끼고 있는 소진

#28 거리
밤―
눈은 멈추고 하얗게 덮인 길위에 검은 그림자 둘이 걸어간다.
스산한 바람소리
소진의 쓸쓸한 얼굴
도오루의 쓸쓸한 얼굴
걷는 두 사람
갈래길에 이르러 두 사람은 헤어진다.
바람 부는 거리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도오루의 뒷 모습
여기 갑자기 현실의 미숙소리
미숙(E) 얘, 소진아
#29 소진의 거실
미숙을 바라보는 소진
미숙 이 아가씨 저녁을 뭘루 대접할까?
소진 글세… 뭘 좋아하죠?
소옥 아니예요. 전 갈껀데요
소진 무슨 소리를… 참 동행이 있나요?
소옥 아뇨. 혼자 왔어요
미숙 그럼 어떻게 그럼 섭섭한 소릴 하죠?
소옥 저의 일본에선 그게 당연한 일인데요?
미숙 우리 한국은 아직 그런 인심으로 변하진 않았어요(웃는다.)
소옥 파파두 그러셨어요. 조선사람은 너무나 착하구 인심이 좋았다구요.
소진 지금 호텔에?
소옥 네 T호텔요. 오늘 도착했어요
소진 소옥양만 불편하지 않다면 여기루 옮기세요. 몇일이라두 몇해라두 난 좋아요.
미숙 그럼 그렇구 말구. 누구의 따님인데…
소옥 저두 선생님 곁에 있곤 싶지만…
소진 싶지만 뭐죠?
소옥 선생님 말구… 저어
소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걱정 안해두 되요
남편은 六·二五때 세상을 떠났는걸… 또 살아있다구 해도 그 이는…
이때 부자소리―
소진 아 우리 아들이 돌아오는 모양이예요
미숙이 달려나가 문을 열자
기철 (들어서며) 어우 배고파아, 아줌마 오셨어요.
소진 아이두 좀 얌전해라!
기철 어 손님이 오셨나?
소옥이 엉거주춤 서있다.
소진 (미소로) 소옥을 바라본 후 기철에게
이 아가씨는 시라이시·스다마양.
해방전 엄마가 퍽 존경하던 일본인 시라이시상의 따님이야.(그늘 없는 표정)
기철 근사한데?
고개를 돌려 소옥에게 씩 웃으며 손을 내밀고
기철 곤니찌와! (소진에게) 엄마 맞지?
소옥 (악수하며) 안녕하세요?
기철 어 이 아가씨 한국말 할 줄 아나? 큰일날뻔 했군!
모두 웃어버린다.
소진 마침 잘 됐구나. 너 소옥양과 얘기좀 나누렴. 젊은 사람끼리니까,
통하는 점이 많겠지. 난 아줌마랑 저녁 준비를 좀 해야겠다.
기철 인제부터야? 난 배고파 죽겠다는데
미숙 염려 말아요. 금방 될테니까.
키친 쪽으로 가는 두사람을 보고있던 소옥과 기철은 다시 눈이 마주치자 웃는다.
소옥이 테라스쪽의 하늘을 본다.
소옥 참 아름다워요.
기철 핫하하. 한국 제일가는 자랑거리는 하늘이랍니다.
소옥 아녀요. 하늘도 그렇지만 모든게 모든제 아름다워요.
기철 음악이나 들을까요. 뭘 좋아하세요? 전축 앞으로 간다.

#30 소진의 키친
미숙 바쁘게 일손을 놀리고 있다.
소진 양파 껍질을 벗기며
소진 집에 안가봐도 돼?
미숙 누가 기다린다구……
소진 며느리는 그렇다치구 영배는 그래두 기다릴거 아냐
조용히 흘러나오는 음악 샹송 "이자벨"
미숙 며느리 얻은 날이 아들 잃은 날이야…
시라이시상 때문에 공연히 그이 생각이 치밀어서… (눈물을 닦으며)
그이두 돌아갔을 거야. 인젠 살아서 만나보긴 글렀어.
남북회담인가 뭔가… 말뿐인 걸…
소진 …그래도 미숙이에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잖아…
내겐 아무도… 이젠 없어…
미숙 ……차라리… 난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듣는게 날것같을 때가 있어
소진 …그거야 말이 그렇지
미숙 아냐 정말! 난 가진 고생 다하구 영배를 혼자 키웠는데
그이가 그쪽에서 다른 여자라도 얻어서 살고 있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소진 하는 수 없잖아. 용서해 줘야지
미숙 얘! 난 옛날에 니가 시라이시상 사랑할 때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결혼은
안한다고 한 말이 잊혀지지 않아.
#30A 소진의 거실
음악을 들으며 앉아있는 소옥과 기철
기철 체류기간은 얼마나 잡고 있습니까?
소옥 여름방학동안이니까 돈 떨어질 때 까지 있을 예정이예요
기철 모레부터 마침 제가 닷새 휴가 맡게되는데 잘됐군요.
엄마랑 셋이서 한바퀴 돌아오죠.
소옥 (웃으며) 제가 참 운이 좋군요!
#31 경부고속도로
끝없이 뻗은 고속도로
쾌속으로 흐르는 풍경
소진(E) 얘 속력 좀 늦춰! 도무지 위험해 죽겠구나
기철(E) 엄마! 자꾸 그렇게 잔소리 할라면 내려서 버스타구 가시지

#32 자가용 안
운전하는 기철 그 옆에 소옥
뒷자리에 소진이 타고 있다.
소옥 (생글생글 웃으며) 마마들은 다 그런가보죠? 우리 마마도 내가 차를 운전하면
아부나이, 아부나이(위험하다) 하는 바람에 신경이 곤두서요.
기철 들었지, 엄마?
하고 홱 뒤돌아본다.
소진 얘! 위험하대두!
깔깔 웃는 소옥과 기철
#32A 현충사
사방이 싱그러운 푸름에 쌓인 현충사. 바람소리에 섞여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경내로 들어서는 소진 일행
기철 예나 지금이나 한국 민족은 남의 나라를 침략할줄도 해칠줄도 모르는
선량한 민족이죠. 풍신수길이가 이땅에…
소옥 풍신수길이라뇨?
소진 아. 도요토미히데요시
소옥 네에. 쵸센세이빠스(朝鮮征伐)때 얘기군요… 알았어요.
한국이 낳은 넬슨 제독 이순신장군!
기철 거북선도 아세요?
소옥 그럼요. 얼마전에 일본의 젊은 사람들이 바다에 가라앉은 거북선을 건진다구
해서 굉장한 화제꺼리 였죠.
기철 모르는게 없군!
소옥 후후! 모르는 거 빼군요. 아마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잠수함이기도 하죠?
기철 두손 들었습니다.

#32B 현충사 분내
경건한 자세로 고개 숙여 절하는 일행
#33 금강 유원지
강위에 떠있는 보트
휴게소 한 테이블에 휴식하고 있는 일행.
강물을 내려다보는 소진의 눈길은 외롭다.
소옥 제가 한국말을 배우게된 동기를 고백해 볼까요?
여중 3학년 때니까 거진 5년전이죠.
파파의 작업장에서 파파의 필적으로 쓰여진 한권의 노트를 발견했어요.
※ 여고생 소옥의 의혹 짙은 얼굴
소옥(E) 한국말로 쓰여진 그 노트의 사연이 전 몹시도 궁금했어요.
우리가 모르는 파파의 어느 면이 반드시 그 속에 있을 것 같아서…
기철 하하하. 그래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군요.
하지만 소옥씨의 말은 한국인의 생활화한 말툰데 어떻게 5년 동안에…
소옥 맞아요. 외국어는 문법부터 배워선 딱딱한 말이 되잖아요?
마침 같은 아파트 앝에 한국서 새로 부임해온 아이를 둘 가진 부부가
있었어요. 걔네들한테 일본말을 가르치구, 전 한국말을 배웠어요.
거의 새활을 같이 하면서요.
기철 지독한 집념이군! 핫하하
소옥 그럼요. 그 땐 파파의 비밀을 캐내가지구 마마 원수를 갚을 작정이였는데요.
(웃는다.)
소진 (미소짓고) 참 소옥양. 마마 얘기 좀 들려줄래요?
소옥 (끄덕이며)… 교육은 없지만… 아주 착하구 무섭게 부지런하구…
어떻게 보면 부처님 같아요. 요세 세상에선 좀 모자란다구 할 정도루…
소진 (끄덕이며) 알겠어요. 마마께선 거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순종하구 참고
견디셨군요.
소옥 네에. 정말 그래요…. 지적(知的)인 정신세계에선 어울릴 수 없었지만,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 때문에 결국은 파파가 마마한테 두손 바짝 든
셈이죠.
기철 (갸우뚱하고 웃으며) 난 이세상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착한 여잔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한 사람두 있었군 그래
소옥 어머? 파파는 선생님처럼 차갑구 깜찍한 여성은 이 세상에 둘도 없다구
하셨는데요?
기철 (웃으며) 자아 슬슬 일어나 봅시다.
통도사 들려서 불국사까지 저녁전에 닿으려면 좀 밟아야겠는데
세사람 자리에서 일어선다.
#34 달리는 차 안
음악은 흑인가수의 걸규 같은 노래가 흐르고 있다.
무언가 무거운 분위기
눈을 감고 흔들리고 있는 소진
소진 (눈 감은채) 철아 음악 뭐 좀 아늑한 걸루 바꿔 주겠니
기철 아 엄마 피로하구나 뭐 클래식으로 할까?
테잎을 바꾸는 기철
음악은 감미로운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첼토로 바뀐다.
소옥 아아! 파파가 좋아한 곡인데…
역시 눈을 감은채 흔들리는 소진
#35 경성 조선인 주택가(밤)
라디오방에서 흘려나오고 있는 같은 음악에 간간 섞이는 전차 소리
간혹 쇼 윈도의 불빛이 가로등 사이사이에서 흐를 뿐 인적 없는 밤거리를 외투 깃을
세우고 베레모를 눌러쓴 소진이 우울하게 걷고 있다. 멀리 골목길을 꼬부라져
걸어오는 한 남자의 후리후리한 모습이 눈에 띈다.
걷고 있는 소진 문듯 긴장한다.
순간 밝았던 불빛을 벗어나 그림자만 보일 뿐
행여나 하는 기대감을 가져보는 소진
밝은 불빛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분명히 베레모의 도오루
소진 "앗 "하고 적은 비명처럼 외치며 그 자리에 우뚝 선다.
사색에 잠겨 걸어오던 도오루의 눈에 포착된―
소진의 가련한 모습
소진 시라이시상!
도오루 아, 웬일이오. 이렇게 늦게
소진 야간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도오루 집이 이쪽이든가?
소진 네
도오루 아무말없이 소진이 가는 쪽으로 뒤돌아 같이 걷는다.
#35A 고궁 담 모퉁이
차가운 달빛 아래 간격을 두고 말없이 걷는 두 남녀의 그림자
고궁의 담이 시작된다.
도오루 고개를 돌려 걷고 있는 소진의 청순한 프로필을 바라본다.
갑자기 "서시오!" 하는 소리
두 남자가 다가오고 있다.
형사A (도오루에게)연말 경계심문이오(한쪽으로 끌며) 잠깐 봅시다.
형사B (소진에게) 이 늦은 밤에 당신들은 뭐요?
소진 (불안하게 도오루 쪽을 보며) 야간 근무하구 오는 길이예요
형사B 직장이 어디요?
소진 마르젱이예요
형사B 골치아픈 좌익 학생들 많이 드나드는데군
소진 (반발하듯) 최고의 지성인이 드나드는 데죠!
형사B (흥미의 눈초리로)똑같은 빵떡모자를 쓰구 저 남잔 애인요?
소진 연말 경계에 관계되는 질문인가요?
형사B (약간 당황) 남자의 성명과 나이는?
소진 시라이시 도오루. 나이는… 모르겠어요
형사B (놀리듯) 애인의 나이도 몰라?
이 때 도오루와 형사A 다가오며
형사A 어이 가자. 이상 무다.(소진에게) 실례했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형사들
소진 안도의 한숨을 내려쉰다.
눈길이 마주치는 소진과 도오루
갑자기 친밀감을 느끼며 웃어버린다.
소진 어머 시라이시상 웃으시는 얼굴 첨이네요
도오루 그랬든가? 어처구니 없을땐 나두 곧잘 웃지
소진 (걷기 시작하며) 시라이시상 나이를 물어서 혼 났어요
도오루 난 누구냐구 하길래 귀찮아서 약혼자라구 했오(쓰게 웃는다.
소진 …(무언지 벅찬 감정)
도오루 소진양 나이를 묻길래 스무살이라구 했는데…
소진 어머나 바로 맞추셨네요
도오루 그것 참!
소진 시라이시상은요?
도오루 시작하구 끝이요
소진 네?
도오루 같은 二十지만 난 마즈막자가 붙으니까
소진 스물 아홉이시군요
도오루 한 일없이 사흘 후면 三十줄에 들게 되지…
소진 (기쁜 듯이)거울이 깨지면 안좋은 일이 있다구 일본 여자들두
꺼리죠?
도오루 그렇지
소진 저 오늘 저녁때 거울을 깼어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이렇게 우연히 시라이시상을 만났어요…
도오루 대답 없이 약간 심각해진 얼굴

#35B 소진의 집 골목 밖
끊어진 대화 속에 걷는 두 사람
소진 (멈춰 서며) 다 왔어요. 이 골목…
도오루 (깨어난 듯) 아… 불심검문 바람에 늦어져서…
마주치는 눈과 눈
도오루 그럼 들어가봐요. 무슨 바람이 불면 마르젱으로 전화 걸지 모르지
소옥 기다리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도오루 손을 한번 올려보이고 돌아서서 가다가 되돌아서더니
도오루 기다리지 마시오
차갑게 한마디 던지고 간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도오루의 뒷모습이 너무도 외롭다.
회오리치는 매서운 겨울 바람
#36 신문사 편집국
책상위에 획 동댕이쳐지는 봉투 사표―
고개를 번쩍 드는 일본인 국장
그 앞에 떡 버티고 선 도오루
도오루 잘 들어두시오! 동남아를 송두리채 삼키려는 군국주의에 아부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시킨 기사는 쓸수 없단 말이오.
아무리 정책상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부패할 수는 없오!
국장… 몰라서 그런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알아두시지.
언론인의 사명은 오직 진실을 알리는데 있다는 것을 말이오!!!
도오루 쏘아붙이고 미련 없이 획 돌아서서 나간다.
국장 (노기충전) 저 저 저!! 죠센징 같은 새끼!! 어디 헌병사령부 맛좀
봐라!!
말단석에 앉아있던 정상훈의 불안한 얼굴

#37 첩첩 산중
연기를 뿜으며 터널을 뚫고 나오는 열차
#38 열차 안
식당차 창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고 있는 도오루
그 얼굴은 해방감에 밝다.
#39 강원도 어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평화로히 모여있는 몇채의 초가집들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40 초가집 방
조그마한 방안에 몇권의 책과 한쪽 구석으로 이젤등의 화구가 놓여있다.
도오루가 누워있는 주변에 구겨진 원고도 여기저기 흐터져있고.
꼬마(E) 아저씨이! 아저씨 눈이 와요
꼬마가 여는 문으로 눈이 날아든다.
도오루 (벌쩍 일어나며) 오― 마지막 눈인 모양이다.
(문득 생각이 나는 듯) 마지막 눈…
꼬마 아저씨 눈 오는거 그림 안 그려요?
도오루 (원고지와 펜을 들며) 잠깐 아저씨 편지 좀 쓰고,
읍까지 산보 갔다 올까?
꼬마 네에 (문을 닫으며) 그럼 나 요기서 바둑이하구 놀고 있을께요.
#41 오솔길
#42 마루젱 창가
편지를 집어넣는 소진
주소 없는 봉투
안타까운 듯 먼 하늘을 바라본다.
미숙(E) 소진아!
소진 아이 깜짝야
미숙 무슨 편지니?
소진 그이한테서 왔어.
미숙 뭐라구?! 어디 있대?
봉투를 보이며
소진 주소 없는 편지야…
미숙 시무룩하다가 갑짜기
미숙 야! 참 느이집 차압당하게 됬다구 그랬지?
소진 응 걱정야… 엄마가 가엾어 죽겠어
미숙 너… 나랑 만주 갈래?
소진 만주?
미숙 응. 마루젱 신경지점에서 여사원 네 사람을 모집한데.
거긴 기숙사두 있구 현지수당두 나와서 꽤 괜찮은가봐.
소진 엄만 어떻허구…
미숙 … 이모댁으로 가시게 될지두 모른다구 그랬잖아
소진 … 홀어머니에 외딸인데 막상 그것두 쉬운 얘긴 아니야
미숙 글세 말야… 허지만 한번 엄마랑 상의해 봐
소진 끄떡인다.
#43 낡은 한옥들
골목 안에 자리잡은 낡은 한옥들

#44 소진의 집안
그 한 채가 소진이 모녀가 사는 집이다.
안방과 마루 건너방 그리고 부엌
부엌에서 숭늉 그릇을 들고 나온 소진 마루로 올라가서 안방으로 간다.
#45 소진의 집 안방
저녁 상이 놓여 있고 소진의 모친 윤씨가 앉아 있다. (교양있는 모습)
소진 엄마 벌써 다 잡수셨어요?
소진 상앞으로 앉으며 숭늉을 내민다.
윤씨 참 이모한테서 편지가 왔다.
소진 … 뭐라구 (윤씨의 눈치를 본다.)
윤씨 걱정하지 말구 너 데리구 내려오라구… 있다가 너두 읽어보겠지만
네 혼처두 아주 좋은데가 나섰…
소진 (펄쩍 뛰듯) 누가 벌써 시집을 간요. 이모두 참!
윤씨 조만간에 가긴 가야지. 내 생각에두 아직 혼인은 좀 이른 것같긴
하다만은
소진 그럼 됐어요. 우리 그 문제는 재론 않기로 해요
윤씨 그나저나 청주로 내겨라도 수입 한푼 없이 형님 식량 축내면서야
살 수 없잖니( 깊은 한숨)
소진 난 삼촌이 정말 미워 죽겠어. 그만큼 엄마를 골탕먹였으면 됐지
어쩜 우리가 살고있는 집까지 저당을 잡혀 먹었을까
윤씨 엄만 정말 네게 할 말이 없구나 …허지만 생각해보면 삼촌도
가엾은 사람이지 살려구 아둥바둥 애는 혼자 쓰구 다니면서 왜
그렇게 되는 일이 없는지…
소진 … 엄마! 나 신경 가서 3년만 있다 올까?
윤씨 신경이라니 만주 신경말이냐?
소진 응 여기보다 월급이 곱은 넘을꺼야
윤씨 그런 험악한 곳에 처녀가 혼자 어떻게 가서 사니!
월급이 아무리 많다구 해두
소진 미숙이하구 같이 말예요. 기숙사두 있구, 같은 회사니까 사람들두
그렇게 험악한 인간들은 아닐꺼구요
윤씨 … 어쩌다 우리가 그렇게도 미워하던 왜놈들의 회사의 월급을
타먹구 살게 됬는지…
소진 그래두 직장은 참 좋은 직장이예요. 보고싶은 책 맘대루 볼 수
있구. 졸열한 왜놈들 꼴 안봐두 되구…
윤씨 만주는 기후가 나빠서 건강한 사람두 견디기 힘들다는데…

#46 하늘
뭉게구름 뜬 고운 하늘에 빨간 흙모래가 날아든다.
완전히 황토색으로 덮이는 하늘
#47 신경 마루젱 지점
간판―
쇼윈도에는 한쪽이 양품 한쪽이 책으로 장식되어 있다.
#48 가게 안
안쪽 깊숙한 곳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 그 한쪽 구석에 소진이 서서
손님을 대하고 있다.
다른 한 쪽으로 미숙의 모습도―
#49 기숙사 소진들의 방 (밤)
육조 다다미 방에 조고만한 취사장이 붙은 구조. 스팀 시설이 되어있다.
청소한 쓰레기를 쓰레받기에 받고있는 소진
미숙이 부엌에서 차를 끓여들고 나온다.
복도쪽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서는 소진
소진 아이 추워! 거기 창문 좀 닫아줘
미숙 (창을 닫으며) 무슨 기후가 이래 오뉴월 한더위에 해만 떨어지면
이 모양이니.
차를 소진 앞으로 밀어 놓는다.
좀 야윈 듯 한 소진의 눈은 슬프다.
방의 정적을 깨고 은은하게 마차의 방울소리가 울린다.
미숙 그럼 너 시라이시상하구 결혼할 작정이니?
소진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미숙 왜 일본사람이라서?
소진 물론 그것두 이유 중의 하나가 돼. 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영원히 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야
미숙 이상한 논리구나. 사랑은 오직 소유하는 것으로만 알구 있는데…
소진 소유…하는 거야. 정신적으로…
결혼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서로의 단점을 의식하면서 권태를
느끼느니 멀리 아름다운 채 사랑하고 싶어.
미숙 에이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오시이레를 열고 이부자리를 내린다.
탁상 위의 시계가 2시를 가르키고 있다.
한 옆에 잠들어 있는 미숙
조금만 스탠드 밑에 소진은 원고를 쓰고 있다.
가만히 턱을 고이고 앞을 응시하는 소진
하얀 손을 뻗쳐 커튼을 들친다.
#49 신경아파트 밖 거리
간간히 가물거리는 외등이 보일 뿐 깜깜한 밖
#49B 소진들의 방
조용히 한숨쉬며 다시 원고에 손을 대는 소진
미숙이 뒤척인다.
미숙 (졸며) 아이 몇신데 아직 안자니. 몸을 생각해야지
돌아보는 소진
미숙은 다시 쿨쿨 자고 있다.
미소지며 불을 끄는 소진
#40 벌판
끝없는 광야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하나 서 있다.
그 곳을 향해 지친 듯 걷고 있는 소진
먼지와 피로에 지친 그 얼굴
방 문앞에 다달아 쓰러질 듯 두드린다.
소진 여보세요… 여보세요
노파(E) 누구요.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소진 길가는 사람인데 너무 피곤해서 잠깐만 쉬려구요
방문을 열고 노파 나온다
노파 여긴 사람 쉴 곳이 못되요
그 노파의 얼굴은 소진모 윤씨다.
소진 어, 엄마!
와락 끌어안는 모녀
소진 엄마 왜 이런 곳에 혼자 살아. 아무도 없는 이렇게 쓸쓸한 곳에
윤씨 인간들 없는 세계가 평화스럽고 좋단다.
여긴 반상회다. 방공연습이다 귀찮게 구는 왜놈들도 안 와요…
소진 (울면서) 싫어. 그래도 싫어! 엄마…
너무 외로와서 정말 못 참겠어요.
윤씨 저게 누구냐. 저기 누가 온다
소진 (돌아보며) 모르는 사람야 엄마 못본체 해요. 무서우니까…
하며 숨으려는데 덥썩 두 손이 잡힌다.
소진 앗! 놓세요. 놔요!!
하고 뿌리치려다
소진 앗! 시라이시상!!
도오루 소진이 얼마나 찾아나녔는지 아오? 인제는 안 놓치겠어
타는 듯 내려다보는 도오루의 눈길
어느듯 소진과 도오루는 손과 손을 맞잡고 들판을 걷고 있다.
#51 호수
호수 앞에 다다르는 그들
소진 왜 그때 계신 곳을 밝혀주지 않으셨어요.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요
도오루 (소진을 껴안으며) 소진이 우리 아무 말도 말자. 이대로…이대로…
호수에 비친 두 연인의 그림자
돌연 물위에 파문이 일며 그림자 흔적도 없어진다.
소진 (절규하듯) 도오루상! 도오루사아앙!!
#52 소진들의 방
미숙이 벌떡 일어나 소진을 깨운다
미숙 얘 소진아. 왜 이래. 응 소진아!
소진 아아… (깨며)… 꿈이었구나
미숙 가위 눌린 모양이지?
소진` 미안해… 요새 잠만 들면 꿈이야
소진 (놀라며) 어머. 저 땀좀 봐!
너 원고지 뭔지 쓴다고 건강 해쳤나부다.
타올을 내려서 닦아준다.
소진 고마워…
허탈속에 빠져들어가는 소진
미숙 안되겠다. 병원에 한번 가봐야지
소진 괜찮어. 원고 탈고하면 괜찮아질거야.
미숙 내일 내 사헤끼부장한테 널 사무실 근무 시키라구 부탁해 볼게
그쪽이 좀 덜 피로할 거야! 얘 한숨 더 자 시간 되면 깨워줄게
미숙은 언니처럼 다정하게 소진을 눕혀준다.

#53 신경 거리
약간 부감으로―
낙엽이 지는 거리를 마차가 간다.
보도 위 사람들 틈에 끼어 걷고 있는 바바리와 베레모의 한 신사.
꼭 도오루다.
#54 마루젱(신경) 2층
사무실 창에서 내려다보던 소진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55 계단과 가게
계단을 단숨에 달려내려와 가게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는 소진
#56 마루젱 가게 밖 거리
달려나온 소진
그러나 이미 그 사람의 모습은 아무데도 없다.
미숙이 달려나오며
미숙 얘 너 별안간 왜 그래?
소진 그분이… 그분이 지나갔어
미숙 무슨 소릴 하는거야. 헛걸 봤겠지.
소진 … 그래 그럴 리가… 없지?
하면서도 못내 안타깝고 아쉬워서…
미숙 그러는 소진의 옆얼굴을 지긋이 바라본다.
#57 작렬하는 포탄
#58 인써어트
전 씬에 겹쳐서
대동아 전쟁 발발
진주만 공격의 신문 보도
여기 군함 마―취가 우렁차게 울린다.
#59 기숙사 소진들의 방
마차 소리도 끊어진 깊은 밤
파리해진 소진이 책상 앞에 앉아 원고 추고를 하고 있다.
갑자기 발작하는 기침
그대로 엎어지는 어깨가 들먹인다.
벌떡 일어나 소진을 일으키는 미숙
미숙 (걱정스럽게) 너 이러다간 정말 큰 일 나겠다.
어서 누워! (물을 딸아주며) 물 좀 마시구
소진 컵에 입을 댔다가 기진한 듯 자리로 가 눕는다.
이불자락을 다독거려 주며 슬픈 듯 소진을 바라보는 미숙
억지로 미소지으려는 소진의 눈
미숙 여기 기후가 네겐 맞지 않는가봐. 너 엄마 곂으로 돌아갈래?
소진 … 일년두 못되서 어떻게 돌아가… 그보다두… 난 얼마 전에
가게 앞을 지나간 사람이 아무래두 자꾸 마음에 걸려…
미숙 소진아!
소진 … 왜?
미숙 … 그 사람 시라이시상이었어
소진 (벌떡 일어나며) 뭐라구?!
미숙 … (괴로운 듯)
소진 그런데… 그런데 왜 내게 알려주기 않았어
미숙 잊을 수 있으면 잊는게 낫겠어서
소진 … 너무해! 정말 너무해!
미숙 (절규하듯) 이 바보야 내가 첨에 얘기 했잖아. 그사람 여자 관계가
문란한 사람이라구
소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야, (소리친다.)
미숙 정말 상관 없단 말야?
그렇다면 내일이라두 시라이시 집에 찾아가봐!!
하며 벌떡 일어나 핸드백을 열고 종이쪽지를 집어 소진 앞에 던지며
미숙 그 사람 주소야. 너 알아서 해.
하고 홱 돌아 앉는다.
소진 …
쪽지를 집어 한참 들여다 보다가
소진 (부드러운 음성으로) 미숙아. 미안해. 네 맘 이해하겠어.
… 허지만 너두 날 좀 이해해 줘… 난 그분의 육체를 갖고 싶진
않아. 설사 그분이 날 사랑해서 결혼을 신청한대두 난 그걸
받아들이지도 않아! 난 나대루 그대로의 그분을 사랑하면
고만인 거야.
미숙 (돌아 앉으며) 내가 졌어.
네가 그런 각오라면 내일이라두 만나게 해 줄게
소진 (미소로 고개 저으며) 난 한번두 그분하구 약속하구 만난 일은
없어. 어떻게 그분이 신경에 오게 됐는지는 몰라두 같은 신경에서
설마 또 만나질 날이 없을라구.
미숙 … 좌우간 그럼 내일은 병원에 가는거야. 너 병원에 데려다 놓고
그 원고 붙여주고 올께.
소진 (와락 미숙에게 매달리며) 미숙아 넌 정말 정말 언니처럼 좋은
친구야. 고마워…고마워…
미숙도 눈물이 글썽해서 소진의 등을 다독거린다.
미숙 … 사실 그이가 가게 안에 들어섰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랜지
아니… 한달음에 네게 알리려구 2층 계단을 뛰어 올라갔어…
그런데 어쩐지 발이 딱 붙어저리지 않아.
작년 첫눈이 내리든 날 널 끌구 나가서 그사람을 만나게 한건
어느 의미에서 널 테스트한 거야. 적당히 장난끼두 섞인
짓이였구… 허지만 그 순각 난 어떤 책임감에 발이 묶였던 거야…
그래도 사흘만에 그 사람 직장과 집 주소를 알아 냈어.
그리구 무턱대구 아파트를 찾아간거야
소진 (끄덕이며) … 가니까 여자가 있었구나
미숙 응. 만나지는 못했어. 옆집 사람한테 들은 얘기지만…
난 평범한 여자라 그런지 그런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
소진 (웃으며) 정말 바보구나.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거지,
그 분이 날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쓸쓸히 미소하는 소진이다.
#60 병원 앞 거리
어둑어둑해진 밖
매서운 바람이 헐벗은 나무가지를 때리고 있다.
병원 문을 나오는 소진과 미숙
목도리로 입을 가리고 걸어간다.
소진 우리 추운데 아르메니아에서 차한잔 마실까?
미숙 그래. 로시아케잌도 좀 사가지구 들어가서 기무라상이랑 유우끼상이랑
불러다가 망년회하자.
쪼끔 나아진 네 건강도 축하할 겸

커튼 사이로 잔잔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러시아 찻집으로 들어간다.

#61 찻집 아르메니아
두서너 곳에 손님이 앉았을 뿐
한산한 찻집 안에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백계로서아인 처녀가 방싯 웃으며 둘을 맞는다.
벽페치카 있는 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던 소진이 깜짝 놀란 듯 우뚝 선다.
돌아앉은 한 남자의 외로운 뒷모습이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다.
튀는 가슴을 억누르며 두어발 다가서는 소진
순간 무엇에 끌리는 것 같이 고래를 돌리는 남자.
바로 그 사람 시라이시 도오루다.
마주치는 소진의 눈
도오루의 눈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물결치며 벌떡 일어난다.
도오루 아니! 언제 신경에 왔오?!
다가가 앉는 소진과 미숙
서로 무슨 말인가 나올듯하면서 말없이 몇 초가 흐른다.
미숙 정말 들어오길 잘했어…
어디서 우연히 만나질거라는 네 생각이 어쩜 이런 좋은 장소와 시간 속에
일치하지?
도오루 (놀란 듯) 그럼 내가 신경에 와있는걸 두분은 알고 있었오?
끄덕이는 소진
도오루 소진양은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성숙해져서 그런가 경성서 봤을 때 애기
같은 모습이 많이 달라졌군요.
미숙 기관지가 좀 나빠져서 병원 신셀 지고 있답니다.
도오루 만주의 기후는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데 각별히 조심해야죠
미숙 낮엔 직장생활하구 밤엔 원고를 쓰구 굉장히 무릴 했어요
도오루 그래요? 역시 문학 소녀 였군. 아! 그러구나니 생각이 납니다.
내가 소진양을 처음 보든 날 이상의 날개를 읽고 있었지.

149P
여드는 미숙
미숙 (소진을 얼싸안고) 얘 소진아!
엉엉 울어버린다.
다시한번 터지는 후랫쉬―
소진 (울먹이며) 이 친구… 그리구 고향에 계신 엄마… 그리구 그리구…
말끝을 맺지 못한다.
기자 (웃으며) 네 알겠습니다. 애인이겠죠!
헌데 그 고차원적인 소설 "파멸"의 여주인공은 리이상 당신입니까?
소진 (미소지며)… 글쎄요… 상상에 맞기겠어요.
기자 (원고지를 주며) 그럼 당선소감 부탁드리고 가겠습니다.
시상식날 뵙지요.
문까지 전송하고 돌아오는 소진을 둘러싸는 사원들
모두 자기일처럼 기뻐하며 한마디씩.
음악이 고조된다.
#65 레스토랑 임페리알
음악 계속되며
백계러시아인의 레스또랑 안이다.
七·八명의 남녀 직원이 소진의 당선 축하 파티를 열고 있다.
잔을 높이 쳐들어 건배하는 그들.
흥분이 가시지 않는 소진의 얼굴.
#66 임페리알 앞
회식을 끝내고 즐겁게 나오는 직원들과 함께 미숙과 그 애인 유병식도 나온다.

미숙 이봐요. 류상(柳さん) 오늘의 여왕 소진양을 좀 에스코트 해줘요.
유병식 웃으며 정중하게 팔을 내밀자 소진도 웃으며 그 팔에 팔을 건다.
직원들 야아. 멋있다.
박수를 받으며 우아하게 걸음을 옮겨 보이는 소진과 유병식
#67 찻집 아르메니아
굽달린 유리 차판에 먹음직스럽게 담겨진 로서아케익
소진, 미숙, 병식 세사람이 앉아있다.
병식 워트카 마시다가 이건 좀 격에 맞지 않는데.
하며 차와 러시아 케잌을 바라본다.
미숙 이 이는! 술만 마시구 저녁 안먹었길래 기껏 생각해서 데리구 들어왔드니
하고 툭 친다.
병식 (사람 좋게 허허 웃고) 소진씨 이 친구와 사노라구 멍 꽤나 들었겠습니다.
소진 미숙이는 사람보고 때려요. 저한텐 얼마나 얼마나 잘해준다고요.
그보다두 저 병식씨한테 축하의 말씀 드려야겠네요.
(한쪽눈을 찡끗하고 미숙을 본다.)
병식 ……?
미숙 (막고) 소진아 아직 안돼!
소진 (웃으며) 괜찮아 병식씬 테스트에 합격하셨어요.
병식 무슨 얘기죠?
소진 미숙이가 말이죠. 눈여겨 테스트하고 있는 신랑감이 있었데요.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병식 어?! 하하하. 그럼 합격이구나 합격!!
미숙 (정갚게 흘기며) 피이. 억지로 백점 만점에 육심점인걸.
병식 점수 한번 지독하게 짜다!
즐겁게 웃는 그들. 오랜만에 소진의 그늘 없는 얼굴이 아름답다.
병식 잠깐!
하구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간다.
소진 병식씨 참 호감이 가는 사람이다.
넌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미숙 네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안심했어! 얘 참 병식씨가 영화구경 시켜주겠데
소진 인제부터?
미숙 응. 막횐 볼 수 있을 거야.
소진 난 사양하겠어. (돌아온 병식에게) 두분이 갔다 오세요. 전 좀 피로해요.
병식 어이 난 소진씨 당선축하로 한턱 내는건데, 그럼 고만두지 (미숙을 본다.)
미숙 어머머. 난 죽어두 갈꺼야!

#68 다른 아파트 복도
소진 한집한집 호수를 확인하며 걸어온다.
白石 徹라는 명함이 꽃혀 있다.
망설이던 소진의 손이 똑똑똑 노크한다.
잠시후― 안에서
여인(E) 도오루상?
문이 열리고 야한 기모노 차림의 여인이 나타난다.
소진 (일순 망설이다가 침착하게) 늦게 죄송합니다.
시라이시상께 알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이 씬의 대화는 일본말로 할 것. 한국말은 자막으로(원고에는 일본말 있음)
여인 (아래위로 훑어보며) 아직 안돌아 왔는데 댁은 누군가요
소진 이소진이라고 합니다.
여인 (경멸하듯) 흥! 죠센징? 참 실례구만 뭔진 몰라두 밤에 부인 있는 남자를
왜 찾지?
소진 난 그분을 이성으로 의식하고 찾은건 아니예요
여인 변명하지 말어! 좌우간 시라이신 집에 없다구.
하고 들어가려 한다.
소진 (순하기만 하던 눈동자에 분노가 일며) 이보세요.
저도 한 말씀 드리겠어요. 남녀관계가 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그런거라야만 하나요? 댁도 누군가 여자아닌 남자 아버지라도 좋고
학교시절의 선생님이라도 좋아요. 존경한 분이 계시겠죠?
난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분을 존경할 뿐예요!
여인 듣기 싫어! 우리 그 인 조선 여자 같은거 안중에두 없다구
소진 죠센징이라 그분의 친구가 될 수 없다구 생각했다면 댁은 시라이시상
부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라구 난 생각합니다. 실례하겠어요!
소진은 싹 돌아서서 간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듯 멍청해버린 여인

#69 신경 거리
마차에 흔들리며 가는 소진
불쾌감과 비감이 교차된 착잡한 얼굴이다.
소진(E) …결국 나두 플라토닉 러브를 외치면서 따지구 보면 평범한 여자인지도 보라.
그 하찮은 일본인 여자에게 나도 모르게 어떤 질투를 느낀 것이 아닐까…
난 지금 말할 수 없는 불쾌감 속에서 어떤 확신을 얻을 수는 있다.
최소한 그 여자가 도오루상의 부인도 아니요,
사랑하는 여인도 아닐것이라는…
마차의 방울소리가 점점 높아지며
#70 통도사가 바라보이는 길
방울소리는 현실음으로―
조랑말의 역마차가 달리고 있다.
소진들이 탄 자가용이 통도사를 향해 달린다.
#71 자가용 안
시트에서 사르르 눈을 뜨는 소진
기철 엄마 통도사 다 왔어!
소옥 (돌아보며) 굉장히 고단하신가봐요
미소로 그덕이는 소진
소옥 마차가… 참 신기해요. 우리가 옛날 사람 같이 느껴지네요.
기철 좀 불결하긴 하지만 운치가 있군.
재차 통행금지의 표말
#72 통도사 앞 길
차에서 내린 소진들이 걸어간다.
흐르는 냇물
소옥이 깡충깡충 뛰어가 냇물에 손을 담그며
소옥 아아 시원해! 이리 와서 손 담가보세요.
기철도 소진을 이끌고 냇물로 내려 간다.
#73 통도사 경내
국보 114호 대웅전
국조 334호 동제향로
관음전
금강계단
무지개다리
몇 百년 묵은 백일홍

종루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세사람의 모습의 이모저모를 그리며
소진(E) 옛날 신라시대 통도사는 해인사 송광사와 더불어 3대 사찰로 손꼽히는 큰
절이었지… 아까 현충사에서도 임진왜란 얘기가 나왔었지만 이 절도 그때
홀딱 불타버리구 나중에 이조때와서 재건된거라구
기철(E) … 참 일본 사람들 옛부터 우리 나라에 못할 짓 많이 했죠
소옥(E) … 정말 부끄러워요…. 생전의 파파한테서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와서
직접 보고 들으니 더욱 부끄러워지네요.
기철(E) 소옥양이 부끄러울 거야 없잖습니까. 굉장히 양심적인 부모를 갖고 있지
않아요. 일본 사람이 모두 그렇다면 난 절대로 미워하지 않았을텐데..핫하하…
#74 경주 시내
천천히 모는 차의 속도로 흐르는 시가지
기철(E) 자아 이제부터 경주 시내로 들어섭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전까지 사실 여기는 고적답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여간해서 들리기 힘든 곳이었죠.
소진(E) 재작년에 왔을 때하군 굉장히 발전했구나
기철(E) 앞으루 몇 년 안가서 여긴 완전히 신라시대로 되돌아간다구!
물론 현대 속의 신라지만 좌우간 그 시대의 모습을 갖추느라고 무지하게
돈도 드리구 애두 쓰구하는 거지. 뭐니뭐니해두 한국 제일가는 자랑꺼리
아냐?

#75 불국사 경내
멀리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울리고 있는 경내에 노을이 짙어간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새 모습을 갖춘 불국사 이곳 저곳을 돌며
소진 소옥양. 금년에 오길 잘했어요. 여기두 임진왜란때 가또오기요마사가 불태워
버리구 돌로 만든 것들만 나았댔어. 이 절엔 정말 너무나 많은 비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요. 이 다보탑 저 석가탑 모두가 애간장 무너지는 석공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거지…. 이번에 신라 때 예모습을 거의 그대로 복원 시킨
거라구
소옥 옛것에는 왜 그렇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몇일을 두고
같은 것만 바라보고 있으래도 싫진 않겠어요.
소진 소옥양 전공과목은?
소옥 동양사예요. 옛것에 이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사실은 이것도 파파에게서
물려진 일종의 유산이예요. 도쿄의 물질문명이 싫다고 파파는 교토에서
말년을 거의 운둔생활 비슷하게 살다 가셨거든요. 어려서부터 전 파파를
따라서 많은 고적을 답사했어요. 파파는 그림을 그리고, 전 역사를 익히고…
기철 얼마전 일본서는 아스까니 뭐니 발굴이 되서 학설이 분분한가 보든데…
소옥 네. 저두 졸업논문에는 고대역사를 통해본 일한 두나라의 관계를 캐보려구
해요.
기철 잘 부탁합니다.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웃어버리는 그들.

#75A 불국사 앞길
토산물 가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세사람 걸어내려오며
소옥 … 소매 스치고, 지나치는 것도 타생의 인연이라는 말 있죠…
기철 어? 지금 나두 그런걸 생각하구 있었는데
소진 세사람의 생각이 다 일치했나보구나
소옥 선생님! 내세가 정말 있다면 거기선 파파를 방황하게 하지 않으시죠
기철 (웃으며) 그럼 우리 파파는 어떻게 됩니까
소옥 참 그렇네요. 허지만 우리 마마도 마찬가지예요
소진 … 그 세계에선… 기철 아빠는 내 오빠가 되고, 소옥이 엄마께서
시라이시상의 여동생이 되어있을까?
내 경우에 부부라기보다는 육친 같은 그런 사이였으니까…
소옥 맞아요!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요
기철 스무살에 만나서 삼십 몇 년인데, 좌우간 부러운 얘기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는게…
우리 세대에선 좀 상상하기 곤란한 얘기 같지 않아요 소옥씨?
소옥 (끄덕이며) 물질문명이 몰고온건 돈과 섹스 만능이예요. 특히 우리 일본!
세계에서 가장 손꼽히는 경제대국이라지만 전 정말 부끄러워요.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에서 고작 그들이 즐기는건 기생파티…
그것 까지도 좋다구 쳐요. 여대생 헌팅 간다고 우쭐대는 그 추악한 꼴들에
전 소름끼칠 정도로 증오를 느껴요
기철 동감입니다. 정말 가소로운 얘기죠. 이 남자 저 남자를 수없이 겪은 밤의
여인들이 내세우는 첫마디가 난 아르바이트 여대생이예요라는 걸 알고나 하는
소리들인지…한국의 지성은 아직도 건전합니다.
일본에 돌아가거든 그렇게 말해주시오.
소옥 네에, 물론이죠. 가만히 보면 일본인도 四十대 이상의 무식층에 그런 졸열한
사람이 많아요. 우리 젊은 세대에선 그래도 올바른 판단을 가지려고 애쓰죠.
기철 우리 그런 의미에서 악수한번 합시다
내미는 손을 소옥도 힘차게 잡는다.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웃는 소진
소옥 전 정말 한국이 너무 너무 좋아요. 우리 오늘 밤은 호텔에 묵지 말고 순
한국식 여관에 묵어봐요.
소진 글세… 한국식 여관에 안내할만한 곳 너 혹시 아니 기철아
기철 가만있자 우리 이렇게 하지!
오늘은 늦어서 안되구 내일 소옥양에게 보여줄만한 기막힌 가정에서 민박을
합시다.
소진 얘 연락도 안했는데 남의 집에 불쑥…
기철 아, 엄마한텐 내 얘기 했지. 군대 친구 엄주일이 집에 초대 받아 갔었든 일
소진 오, 그래. 四대가 한집에서 산다는 ?
기철 맞아요. 바로 그 친구 집이야. (소옥에게) 한국엔 아직도 남아있는 아름다운
풍속 중의 하납니다.
소옥 四대라면… 아들 아버지 (손으로 꼽으며) 할아버지 그리고 또…
기철 증조할아버지죠. 그런데 증조할아버진 돌아가시구 할머니만 계시죠.

#76 동해안 길(낮)
해안선을 끼고 절경을 이루는 길을 그들의 차가 간다.
소옥(E) 四대씩이나 한집에 모여살면 제네레이션이 달라서 불편하지 안을까요?
기철(E) 그게 도무지 어떻게 된 노릇인지 큰 소리 한마디도 새어나와본 일이
없다는군요.
소옥 기막힌 얘기네요!
#77 농어촌
땀흘리고 일하는 남녀노소의 모습들
마을 어디를 보나 정결하게 가꾸어진 것이 역역히 눈에 띈다.
기철(E) 그 집안의 가훈이 바로 이 마을의 전통이죠. 새마을 운동 이전의
새마을이었다고나 할까요. 이 마을에는 노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한평의 땅도 놀리는 땅이 없다고도 하드군요.

#78 차안
소옥 (감탄한 듯) 정말 기름지고 정결한 마을이네요.
기철 (씩 웃으며) 거기 노할머니 말씀이 걸작입니다. 집안이 구순할려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좋으면 고만이라는 거죠.
그러기 위해선 새며느리를 맞아도 그것을 며느리로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소옥 그럼 뭘루 생각하나요?
기철 딸로 생각하라는 거죠.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소옥 그럴 듯 해요. 정말!
#78A 엄주일의 집 앞
차는 조금 떨어진 언덕위의 큰 농가지 앞에 이른다.
소를 몰고 앞서가던 소년이 차소리에 돌아본다.(주일의 남동생)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 같은 듯 꾸벅 인사하며 웃는다.
기철 잘 있었니?
남동생 예, 우리집에 오싰입니꺼?
기철 응!
소년 신나는 듯 소리친다.
남동생 아지매요! 서울서 손님 오싰입더!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잇던 젊은 여인이 돌아본다.
기철이 뛰여내려 성큼성큼 걸어가며
기철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여인 부끄러운 듯 아랫배에 손이 가며
주일부인 누구신지예…? 앗 우야꼬! 한번 오싰든… 군복을 벗으신데다예 하예지시서
못알아비았구만요.

#79 자가용 안
소진 주일부인의 거동을 보고
소진 (웃으며) 소옥양 이댁이 四대가 아니라 五대가 되려나 봐!
소옥 네?
소진 호호… 있다가 알게될꺼야.
#80 주일의 집 대청
마당에서 피어오르는 모깃불―
소진과 소옥을 중심으로 노할머니를 위시해서 할아버지 내외부모, 주일부인
그리고 동생들 셋.
참외, 수박들을 먹고 있다.
여학생인 주일의 동생. 국민학교생인 남동생이 행여 손님 앞에 실례를 할까봐
조심한다.
남동생 (소옥을 가르키며) 저 가시나 꼭 만화에 나오는 인형같다.
그쟈! 누부야. 응?
여동생 (머리에 살짝 꿀밤을 먹이며) 가시나가 뭐꼬. 손님 아가씨쟤
노할머니 (소진을 향해) 보소! 밋살이락했쟤
할머니 쉰세살이락꼬 안했습니꺼(웃는다)
노할머니 내사 아모리봐도 쉰세살론 안보인닥하이! 주일오매가 마흔일곱 아잉강
딸이락해도 고지 안듣겠나
주일母 할무이요. 지는 마 부끄러바서…
모두 한바탕 웃는다.
이때 기철과 주일이 마당을 거쳐 들어온다.
소옥 옆에 걸터앉는 기철
소옥 어디 갔다 오셧어요
기철 (싱그레 웃고) 스모오킹! (작은소리로)
우리 한국선 어른 앞에선 못피우거든요.
소옥 죽 앉아있는 어른들을 한번 둘러보며 의아한 듯 끄덕인다.
기철 (다시 귓속말) 자아, 인제부터 노할머니 연설시킬께요.
(큰소리) 할머니 홀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노할머니 내 나이 아흔이등강 (껌벅껌벅)
기철 (작게) 인제부터가 테프·레코오더야.
(큰소리로) 九十고령에 그렇게 정정하세요?
벌써 젊은 사람들은 길길 웃기 시작한다.
노할머니 하문, 정정하구 말구. 내 딱 백살꺼지 살끼로구만…. 내나이 열다섯에
엄씨가문에 여위어왔을 쩍에 증조부모님이 안즉 살아기싰재. 그쩍에
증조부님께서 내한테 이런 이바구를 들려주셨네라.
열심히 듣고 있는 소옥
노할머니(E) 집안이 구순하라몬 첫째도 참고, 둘째도 참고, 셋째도 참는기다.
남남찌리 만내서 살자카몬 첨엔 서로 맞지않는 것도 많은 벱이지.
자고로 한집안은 그집 아낙네들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가풍이 좋게도 나쁘게도
이어져내려가는 거니라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들 위해
노할머니(E) 첫날밤을 치루기 전에 들은 이 말씸이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구마.
우리 내외 앞으로 아들 셋에 딸 둘 놓고, 큰 아들 장가보내 손주 셋에 손녀
하나 큰 손주 장가보내 머슴애 셋에 가시나 하나. 四대를 이어오는…
아이다. 쪼매 있으면 증손주 며늘아아가 알라를 날낀데, 그라모 우찌되노.
五대 아잉강,
남동생 할매요. 틀렸구마! 四대를 이어오는 긴긴세월동안을…
여동생 (또 꿀밤을 주며) 니는 모리면 가만 있가라
주일부인이 홍당무가 되고.
기철 엇? 드디어 五대 돌판가! 주일이 축하한다!!
손을 내밀고 악수하자
소진이 소옥을 보고 웃으면 소옥이 알았다는 듯 웃는다.
#81 바닷가
기철과 소옥, 주일과 부인 젊은 사람들은 산책을 즐기고 있다.
소옥 전 정말 너무 감격했어요. 아마 제 일생동안 두고두고 잊지 못할거예요
기철 도시의 가족들을 보면 앞으로 머지않아 완전히 핵가족 중심이 될 것 같은데
주일인 어때. 따로 나가 서울서 살고싶은 생각은 없나?
주일 (씩 웃고) 저 사람한테 물어봐라
주일부인 지는 이고장이 참으로 좋십니더. 시댁은 친정보담도 더 정이 들고예
허지만 예…(붉어지며) 노할머니께선 알라를 다섯만 놓락고하싰지만,
지는 딱 둘만 놀 작정입니더.
기철 (웃으며)겉보기 새마을 사업이 아니었군.
둘만 낳아 잘 기르자도 철저하신데 그래. (모두 까르르 웃는다.)
파도가 쏴― 밀려간다.
#82 주일의 집 사랑방
불을 끈 방안
모기장속 이부자리에 누어있는 소진
파도소리에 겹쳐 멀리 개구리 울음 소리가 정적을 깨고 있다.
어둠속의 소진의 눈은 외로움에 젖어있다.
#83 서울 근교의 어느 암자.
파도소리는 잦아들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해지는 가운데 목탁소리가 겹쳐든다.
달빛 교교한 암자 경내를 젊은 여승이 도량석을 돌며 천수를 외우고 잇다.
#84 암자안 소진의 방 (여름)
윤씨 어둠 속에 앉아 염주를 돌리며 역시 천수를 외운다.
한쪽 벽에 붙여 깔리 요위에 지친듯한 소진이 잠들어 잇다.
#85 계곡(아침)
울창한 숲속을 누비며 맑은 시내가 흐른다.
아침 공기를 마시며 소진이 산책하고 있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숨는 다람쥐
미소하는 소진. 문 듯 사람의 발소리에 한곳을 본다.
아랫마을 찬가게의 주인이 두부목판을 들고 올라오고 있다.
소진 아저씨 안녕하세요
가게주인 어이구 산책 나오셨군요. 신색이 썩 좋와지셨구먼
소진 그래요? 허긴요. 몇일은 새벽에 도량석하는 것도 모르고 잘 정도가 됐어요.
가게주인 암 그러셔야지. 젊어서야 잠들었다하면 누가 떠업어가도 모르고 잘정도라야죠.
웃는 소진
가게주인 그럼!(하고 가려다) 아차!! 잊을뻔했군. 편지가 왔읍니다요.
어제는 절에 올라올 일이 없어서 하루 묵혔죠.
하고 두통의 편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준다.
받아서 뒷면을 본다.
한통은 미숙으로부터 또 한통에는 白石徹이라는 세 글자.
앞면에는 전송쪽지가 붙어있다.
놀라움과 반가움과 형얺기 어려운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는 소진의 얼굴
봉투를 뜯으며 바위에 걸터앉는다.
도오루(E) 소진양!
헤어진지 二년반이 지난 오늘의 이편지가 혹시 실례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건강해진 몸으로 결혼해서 행복해진 소진양이라면 회답하는
번거로움을 피하십시오.
바시시 웃는 소진
도오루(E) 소진양에게 드려야 할 당선축하가 늦어졌습니다. 다만 그 소설이 소진양의
아름다운 모국어로 쓰여질 수 없었다는 것이 마음 아프고 슬펐던 저 올시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 날밤―
#86 레스토랑 임페리알 앞

#87 도오루의 아파트안
#88 창공

#89 밀밭
#90 개울앞
#91 오솔길

#92 사과밭
#93 계곡
흐뭇한 미소로 읽고 있는 소진
도오루(E) 혹시 경성으로 돌아가시는 길에라도― 아니 욕심 같아서는
일부러라도― 이곳에 여름 휴가로 들려주신다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건강하시기를 빌며 나와 나의 증오스럽고도 버릴수 없는 조국
일본이 저지른 수많은 죄들에 대해서도 용서를 바랍니다.
소진의 볼을 타고 줄지어 흐르는 눈물
#94 암자 소진의 방
불꺼진 방안에 소진과 윤씨가 잠자리에 들어있다.
소진 … 엄마
윤씨 왜? 또 잠이 안오니?
소진 미숙이가 애기 날 날이 가까워오나봐
윤씨 그래? 세월도 원 하도 빨라서…
소진 나 아무래도 미숙이 애기 날 때 가봐줘야 할까봐…
윤씨 글쎄다… 앓는 너를 친형제 이상가게 돌봐준 사람이긴 하지만…
네가 워낙…
소진 괜찮아요. 지금은 여름철이구 가서 오래 있지 않을걸요.
뭐 삼칠일가지 만 봐주면 될꺼야요.
윤씨 얘기야 백번 마땅한 얘기지…
소진 그럼 팔월 초순에 가기루 정할테야 응 엄마.

#95 평양 제철공장 사무실
요란한 공습경보 소리
우뚝솟은 몇 개의 연통을 배경으로
사무를 보고 있던 몇 명 안되는 직원들이 후다닥 뛰여나간다.
도오루도 문 앞까지 갔다가 왠지 문득 그 자리에 서버린다.
그리고 서서히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종이를 꺼내더니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도오루(E) 공습경보가 울리고 대피호로 가려던 순간 왜 갑자기 소진양 생각이
떠 오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절대적인 이 순간!
이때 천지를 진동하는 포탄 소리.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 흐터진다.
편지를 움켜쥔채 밖으로 달려나가는 도오루

#96 방공호 안
뛰어드는 도오루
어두컴컴한 방공호 속에 수많은 사람의 눈들만이 공포에 떨고 있다.
#97 다시 공장 사무실
구겨진 종이 위에 쓰던 편지의 다음이 이어진다.
도오루(E) 방금 대피호에서 나왔습니다.
도오루의 조각 같은 푸로필
도오루(E) 종이가 꾸겨져서 실례…
소진양… 영혼과 영혼이 결합한 것 같이 그 순간 지키고 또 지킴을 받는
소진양과 나였다고 나는 밑고 있습니다.
#98 방공호 안
한 구석에 편지를 움켜쥔채 쭈그리고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도오루
도오루(E) 소진양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대피호 안의 절대적인 순간에서도 불안과
공포 없는, 차라리 황홀한 기분 속의 나, 시라이시·도오루였던 것입니다.
#99 공장 사무실
편지를 쓰고 잇는 도오루
또다시 공습경보가 시작된다.
도오루의 표정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도오루(E) 두 번째 공습경보가 울리고 있지만, 그냥 계속하겠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삶과 죽음의 생각만이 오가고 있겠지요.
다음 순간 나도 이미 호흡하지 않는 인간이 될지 모르지만, 지금 나의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나이 三十四세에 비로소 느끼는 평화―. 바꾸어 말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도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설사 그것을 남이 신파 멜로
드라마라고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100 암자안 정자
뽀얗게 흐려지는 편지 위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소진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도오루(E) 몸 약한 소진양이 미숙씨의 해산을 도우러 신경으로 가신다는 말이 한편
불안하고 한편 재회의 기뿜이 되지 않을까 기대도 됬었는데, 추신에 평양에는
들리지 않겠다고 못박힌 말이 못내 서운하군요.
인제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대피호로 갑니다. 총총. 이만
#101 흐르는 전원 풍경

#102 달리는 열차
#103 열차안
소진이 감명 깊에 밖을 내다본다.
#104 평양역
평양이라는 푯말
"HEIJO"라고 표시된 것도―

#105 열차안
웅성웅성 하고 있는 승객들
창가에 앉아 눈의 안정을 잃고 있는 소진
소진(E) 강서― 강서… 여기서 내려야 하는 곳…
옆자리로 돌아온 청년이 사이다병을 소진에게 준다.
청년 더운데 이거라도 드시죠
소진 고개를 젓는다.
청년 드세요
떠마끼다시피 준다.
하는 수 없이 받은 소진 창가에 놓고 일어서며
소진 저두 바람 좀 쏘이고 오겠어요.
청년 떠날 시간인데요.
하고 시계를 본다.
발차 벨이 울린다.
소진 자리를 빠져 나와 승강구 쪽으로 간다.
승강구 앞에 온 소진 한곳을 보고 깜짝 놀란다.
#106 평양역 플랫폼
내다본 눈으로 건너편 눈에 드이는 곳에 세워진 플랜카드
李素珍 孃
그 옆에 목발을 짚은 도오루가 초조하게 서있다.
#107 열차 승강구
승강구 손잡이를 잡은 소진의 팔에 경련이 일고 있다. 서서히 움직이는 기차

#108 평양역 플랫폼
실의에 젓어 시선을 떨구고 서있는 도오루
고막을 찢는 시적소리에 섞여
소진(E) 시라이시 사―o
깜작 놀라 시선을 든다. 그 시선에 포착되는
#109 열차 승강구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는 열차에서 절규하며 뛰여내리려는 소진
억센 청년의 팔이 소진을 나꿔챈다.
#110 평양역 플랫폼
불편한 목발로 안간힘을 쓰며 달려오는 도오루(움직이는 차에서 본)
도오루 소진양―!
#111 열차안 승강구
소진 도오루 상!
그 소리가 오열로 바뀐다.
#112 평양역 플랫폼
허탈 속에 쓸어질 듯 서있는 도오루
열차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간다.
#113 열차안 승강구
속력을 가하는 열차 승강구에 서서 흐느끼는 소진의 뒷모습.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
#114 평양역 플랫폼
아무도 없는 플랫폼 한가운데 그냥 서있는 도오루의 고독한 그림자
#115 국기 게양대
펄럭이던 일장기가 모진 바람에 짝 찢겨진다.
툭 떨어져 내리는 일장기
서서히 태극기가 올라간다.
스파인포즈
一九四五年 八·一五 해방
#116 피난민 열차
달리는 열차
승강구에 매달린 사람들
열차 지붕위
화통 앞
초라한 인간들이 버러지모냥 열차에 매달려 있다.
#117 무개화차안
콩나물시루처럼 빡빡히 들어찬 피난민 속에 소진과 미숙 그리고 그의 남편 병식이
한구퉁이에 짐을 깔고 걸터 앉아 있다.
산후에 고생을 겪은 미숙의 수척한 얼굴 가슴에 생후 한달도 못된 간난이를 품고
있다. 애기가 지친 듯이 운다.
미숙 (안타까운 듯 다독거리며 소진에게) 얘 너 이차가 마즈막이 될지도
모른다는데 내렸다가 나중에 어쩔려구 그래
소진 걸어서 경성까지 가는 한이 있어도 그냥은 못지나가겠어. 네겐 애기 아빠가
계시니까 안심하구 내릴래
병식 (걱정되는 듯) 허지만 그 많은 일본인 가운데서 찾어진다는 보장도
없잖습니까
소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야 해요.
…만나서 잘 가라는 인사 한마디
하고 말을 잇지 못한다.
소리 평양이다. 평양!
소진 벌떡 일어선다.
소진 잘가 미숙이! 부탁해요. 병식씨
일어나지 마세요. 자리 뺏기니까.
#118 평양역―
멎은 열차―
무개화물차에서 병식이 내밀어준 손목에 매달려 위태롭게 뛰어내리는 소진.
륙색을 메고 있다.
아우성치며 밀어 닥치는 사람들을 헤치고 소진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온다.
소리 일본인은 이쪽으로 모이시오!
많은 피난민이 소리난 쪽으로 몰려 간다. 소진도 그 쪽 대열에 섞여서 밀려가고 있다.
日本人收容所案內
라고 쓰인 표말이 보인다. 소진 안깐힘을 쓰며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간다.
달려오던 소진이 우뚝 선다.
표말이 서있는 곳 출입구에 서서 일본인들을 체크하고 있는 여윈 도오루의 모습
소진(E) 시라이시상―o
도오루 감전이라도 된 듯 이쪽을 본다.
달려오고 있는 소진
목발은 집지 않았으나 다리를 절며 역시 달려오는 도오루
약간의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일순 딱 멈춰선다.
소진의 얼굴
도오루의 얼굴
이윽고 소진 총알처럼 달려들어 도오루의 가슴에 안긴다.
와락 끌어안는 도오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소진의 볼을 적시는 눈물
그 어깨 위에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
도오루의 눈물이다.
이때 쏴―하고 소나기가 쏫아지기 시작한다.
#119 강변
비는 멎었다
함빡 비를 맞고 푸름이 짙은 강가의 나무들
그 어느 나무 그늘에 소진과 도오루는 거리를 두고 앉아 잇다.
후두둑! 바람에 나뭇잎에 고였던 비방울이 소진의 머리위로 떨어진다.
올려다보는 눈에 맑게 개인 하늘 뭉게 구름 저편에 거짓말처럼 아롱진 긴 무지개
소진 아… 무지개가
가르킨다.
도오루 (올려다 보고)……
슬픔이 도오루의 눈을 스친다.
소진 견우직녀가… 만난 것 처럼… 아니 헤어지는 다릴까요…
도오루 ……
소진 ……
바람이 쏴―하고 지나가며 다시 후두둑 물방울이 그들을 적신다.
소진 진작 그 때 평양역에서 밖을 내다 봤다면 전 도저히 도오루상을 놔두고
떠나지 못했을 거예요
도오루 … 소진양이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우린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없었을 거요.
소진 마음으론 지켰지만, 그런 중상을 입으신 분을…
도오루 내 이 다리가 언제 이렇게 된지 아오?
공습경보 내리던 날 두 번째 폭격에서 파편을 맞은거요.
소진 그럼 제게 편지 쓰신 직후…
그렇다면 저 때문에…
도오루 (웃음 띄우며) 그 순간은 그렇게 말해도 무방할지 모르지. 그런데 평양역에서
소진양을 놓치고 병원에 돌아가니까 소집영장이 나와있었오.
소진 어머나…
도오루 내 다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었다면 난 결국 도리없이...
소진 아아 소름이 끼쳐요…
도오루 참 축하가 늦어졌오
소진 네?
도오루 (손을 내밀며) 조선 독립 축하 말이요
소진 (잡으며 눈물이 글썽) 고마워요
도오루 (지방해지며)… 참 이상한 일이요. 천황의 항복선언을 들으면서 순간
소진양을 생각했고, 그 다음엔 웃음이 터지려구 하드란 말요.
그리구 그 다음에 온 것이 뜻밖에도 육친에의 그리움 그것이 다시 번져서
동포들에 대한 연민으로 집약되면서 한 없이 눈물이 쏟아지더군…
소진 알 것 같아요.
도오루 평소에 익혔던 로서아어가 도움이 되서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고, 불쌍한 동포들의 상담역도 되줄 수 있었오. 그리구 그로 인해 다시 소진양을 만나게 된 거구…
소진 부모님들은 지금 어디 계세요?
도오루 나고야에 살고 있을 거요. 서신을 끊은지가 하두 오래되서…
소진 무척 보고싶으시겠죠
도오루 어머니는 보고싶소… 허지만 일본에 돌아가도 아버지는 만나지 않을 거요
소진 왜요?
도오루 … 챙피한 얘기지만 아버지는 도둑의 두목이였오.
소진 네?!
도오루 내가 부모를 따라 조선에 건너온 게 5살때였지. 경찰 간부로 있던 내 부친이
사표를 내고 경주 출입 잦자지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2학년 무렵이든가.
그리구 2년 후 나는 내 아버지가 도굴범의 총수라는 것을 눈치챈거요.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오. 아버지를 죽이려다 실패한 나는 그 부친의
자식 되기를 거부했고 그때부터 나의 긴 방랑 생활은 시작됬던거요.
난 고학으로 고등학교 대학과정을 마쳤지… 그동안 어머니가 몰래 나를
도와주려고 무척 애를 쓰셨지만 종내 일전한푼도 받아쓰지 않았어…
도둑질해서 번 돈인줄 알면서 내가 그 돈을 어떻게 받느냐 말이오… 부친은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주체하지 못해 여인들에게 물뿌리듯 뿌리고 있을거요…
소진 … 형제분들은요?
도오루 부친과 반죽이 맞는 형이 하나 있고, 여동생 하나 있던 건 내가 집을
뛰쳐나온 3년 후에 심장병으로 죽었다고 들었오. 나를 무척 따르든 앤데…
소진 ……
도오루 비록 부자지간의 의를 끊었다곤 하지만 난 나대로 조선사람들에게 갚아야할
많은 빛을 진 죄인의 의식을 벗어날 수가 없었오…
소진 … 이제 그만!
도오루 아니 조금만 더 들어요… 그 죄의식은 병적일 정도로 내 마음속에 파고
들었지… 추악한 일본인의 피가 흐르는 나 자신도 용서할 수가 없었어… 난
나의 육체가 썩어문드러지길 바랐오. 그래서 난 일부러 창녀들만을 상대하고
살았던 거요. 허지만 한번도… 단 한번도 조선여자를 건디려보지는 않았어.
비록 창녀라 할지라도 말이오… 소진양!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고만이지만
신경 내 집에서 소진양이 만났던 여자. 그 여자 역시 그런 여자였고, 그일이
나의 긴 자학의 여로에 종지부를 찍게한 것이오. 그날 이후 삼년 가까운
세월을 소진양의 그 맑은 눈의 응시를 받으며 그 눈과 대화하며 살아온 거요…
소진 … 지금 어디에 기거하고 계세요
도오루 수용소 가까운 곳에 비교적 깨끗한 이층방 하나를 배당 받았오.
소진 절 그곳으로 데리구 가 주세요
#120 저무는 하늘
온 하늘을 붉게 물드리며 지는 해

#121 도오루의 방
창가에 돌아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소진―. 미동도 안한다.
다다미 방 한쪽 구석에 다리를 뻗고 앉은 도오루는 소진의 그 모습을 스케치 하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도오루 소진양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몇번을 붓을 들어봤는데 영 떠오르질 않더군
소진 (돌아서며) 절 그리구 싶으세요?
(하고 보니 도오루가 그리고 있다.) 어머 전 그것도 모르구…
도오루 뭘 생각했오?
소진 이젠 헤어지면 영원히 못만날 것을요. (슬프다)
도오루 지금 떠나겠오?(새삼 충격을 느낀다.)
소진 (고개 저으며) 저 오늘 밤은 선생님 곁에서 지내겠어요
도오루 소진!!
소진 그리세요! 황혼을 안고 창가에 선 이브를 그리세요.
(옷을 거침없이 벗으려 한다.) 저의 영혼을 물태운 첨이자 마지막인 사람
도오루상에게 드리는 저의 가난한 선물…
도오루 그냥! 소진 옷 입어요. 그저 그렇게 거기 앉아 있어주면 돼!
소진의 눈, 코, 입, 귀, 모든 것을 내 망막 속에 사귀어 놓겠어!
소진 와락 도오루 품으로 달려든다. 불길 같은 소진의 눈 입술에 도오루의 뜨거운 입술이 덮친다.
감긴 두눈에서 새삼 방울지는 소진
그 눈꺼플 위로 도오루의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O.L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창에는 어둠이 깔려있다.
먼곳을 응시하고 있는 소진의 눈
스케치되고 있는 눈 눈 눈
냉혹하리만치 차게 빛나는 도오루의 눈.
방바닥에 흐터진 스케치의 자취들.
긴 목덜미와 프로필의 가지가지
도오루의 눈
#122 길모퉁이 (밤)
몸뻬차림의 일본여인이 않은 소녀를 업고 허둥지둥 병원 문을 들어서려 할 때
모퉁이를 놀아나오던 소련병 두 사람이 와락 그들에게 덮친다.
#123 도오루의 방
찢어지는 여인의 비명소리
앉았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소진
소진 아아! 저 소리 (하며 귀를 막는다.)
그러나 도오루는 눈길에 슬픔만 일렁일 뿐 스케치하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소진 八·一五되고 신경에서도 수십번 들은 소리예요.
도오루 전쟁에 지면 어디서나 죄없는 여인들이 당하는 일이오
소진 너무나 비참해요…
도오루 스케치하던 것을 밀어 놓고 소진 곁으로 온다.
소진 가만히 도오루의 가슴에 고개를 묻는다.
도오루 소진! 왜 하필이면 이렇게 비참한 환경 속에서 우리가 만나야했을까…
소진 … 전 부모님들이 그랬드시 일본인들을 증오하면서 살았어요.…
허지만 제가 어린 소녀쩍부터 꿈꾸고 그리던 이상형의 남성은 오직 일본인인
도오루상 뿐… 허지만 전 도오루상을 일본인이라고 의식한 일은 거의 없었어
요. 그걸 느끼게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일본이 지고 우리나라가 독립하
게 되면서 전 비로소 도오루상이 일본사람이었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어요.
(흐느끼며) 헤어져야한다는 일이 어쩔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도오루 우린 지금까지도 늘 헤어져있기만 했잖소! 난 그게 후회가 되…
소진 우린 이젠 다시 만날 수 없을 것같은 예감이 들어요.
전 이밤이 새고나면 도오루상 곁을 떠나요… 그리구 잊으려고 노력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하고 결혼도 하겠죠.… 서로가 잊어야죠. 도오루상도
절 잊어주세요…
도오루 잊을 수가 있을까. 난 소진을…
소진 (그 입을 떨리는 손끝으로 막으며)… 잊으세요. 잊으셔야 해요.
그리구 먼 훗날 도오루상도 소진이도 늙었을 때 저의 부부와 도오루상 부부가
유럽의 파리와 로마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맞부닥쳤을 때…
우리 그때는 웃으면서 옛날 죽도록 사랑했던 사이었노라고 공개하기로 해요…
(오열이 깊어진다.)
도오루 고만! 고만해 줘!! (절규한다.)
소진 도오루 상!!
와락 껴안고 몸부림치는 두 사람
소옥의 소리 엄마 주무시나봐요.
#124 주일의 집 사랑방
벼개를 적시고 울고 잇던 소진 깜짝 놀란 듯 일어나며 머리맡 스탠드를 켠다.
기철(E) 그럼 소옥양 잘 자요.
소옥(E) 안녕!
발소리들이 멀어진다.
소옥 (들어서며) 어머 안주무셨어요?
소진 (모기장을 들춰주며) 어서 들어와요.
소옥 가만 계세요. 잠옷 갈아입구요
하고 한쪽에 놓인 트렁크로 가며
소옥 선생님 감기드셨나봐. 목소리가 잠긴 것 같아요. 방문 닫을까요?
소진 괜찮아요. 새벽에 선선해지면 내가 닫지…
소옥 스스럼없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트렁크를 닫으려다가 문 듯 언젠가의 노트를
집어 올린다. 그리고 빽 속에서 그것을 들고 모기장 안으로 들어서는 소옥. 그리고 단정히 소진 앞에 꿇어 앉으며
소옥 이 노트. 선생님께 전하겠어요. 파파의 노트예요.
하며 첫장을 들쳐 소진 앞에 내민다.
斷絶의 歲月 - 素珍에게
라는 두줄의 글씨가 순간에 확대된다.
소옥(E) 파파의 화실에는 수없이 많은 선생님의 그림이 걸려 있었어요.
소옥 제가 선생님을 뵈운 순간 어려서부터 아는 분을 대한 것같다고 말씀드렸죠…
파파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선생님과 같이 지내신 거예요.… 화상들이
아무리 그 그림을 탐내해도 파파는 하나도 내주지 않았어요.
눈물로 얼룩진 소옥의 얼굴
소진의 얼굴. 그 눈―
소옥(E) 그리구 이거…
소진의 눈이 그쪽을 본다.
소옥이 내미는 봉투 한 장.
소옥 엄마가 수속한 초청장이예요. 파파가 남긴 수많은 유작들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래요. 화실은 파파가 돌아가신 그 날 그대로 지켜지고 있죠.
마마는 정말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파파의 한이 곧 마마의 한이라고요.
꼭 꼭 두사람의… 아니 저까지 세사람의 소원을 풀어주세요. 꼭 풀어주셔야
해요. 네?
소진 손을 뻗어 소옥의 손을 잡는다. 순간 소옥은 와락 소진의 품으로 달려들며 울음을 터트린다.
소옥 파파! 파파노 바까! 바까! (파파는 바보! 바보~) 진작 살아서 만났으면
좋았을 걸…
소진 (등을 다독거리며) 소옥양. 엄마께 전해줘요. 초청을 기쁘게…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구요.
얼룩진 볼을 부비며 끄떡이고 또 끄떡이는 소옥
#125 바다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부서지는 파도, 파도―
거기 겹쳐서 떠오르는 젊은 날의 도오루의 외로운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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