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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세이_1) 여류 영화감독의 비애(月刊 世代, 1976년 신년호)

2023-11-25 조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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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심취했던 여고시절
엔드 마크 자막이 떠오르고 장내에 불이 밝혀진다. 가랑머리 소녀는 살그머니 목을 움추린 채 죽은 듯이 앉아 있다.
들고 나는 사람들로 한참 붐비던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을 무렵 소녀는 겁먹은 얼굴로 무언가에 이끌린 듯 고개를 돌려 위쪽을 올려다본다. 그곳에 네모꼴 검붉은 얼굴, 거대한 체구의 P선생의 치켜올라간 무서운 눈꼬리가 소녀를 노려보고 있다. 少女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수학, 그리고 P선생은 수학선생, 게다가 내일은 수학의 학기말 시험!
눈이 마주친 순간 소녀의 얼굴은 하얗게 바랬지만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가지는 않는다. 이제 와서 나가봤댔자 들킨 사실이 말소되지는 않을 일. 소녀는 체념하고 선생의 처분을 기다린다. 그러나 P선생은 목덜미를 잡아 일으키지도 않았고, 다음날 직원실로 호출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여름 방학 날, 통신부를 받아든 소녀는 다시 한번 파랗게 질린다. 수학점수가 28점, 과목낙제. 다음 학기에 만회를 못하면 도리 없이 낙제
P선생의 깊은 사려와 무거운 침묵은 소녀를 많은 일본인선생의 차가운 눈총에서 모면케한 대신, 싫건 좋건 수학공부를 안하고는 못배기게 만든 것이다.
때는 1936년 7월. 소녀는 요조숙녀 현모양처를 길러내는 명문 京畿高女 2학년 때의 필자의 모습이다. 그때 明治町 明治座(지금의 명동 예술극장) 2층에서 선생에게 들키고도 못다본 중간까지 보고 일어선 것은 확실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때의 상영물이 펄벅의 <大地>였는지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레이트 왈츠>였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가 너무도 좋아, 영화만 보며 살 수 있었으면 하던 시절. 기회만 있으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닥치는 대로 보러 다녔다. 개봉관은 비싸니까 주로 喜樂館, 浪花館같은 2번관으로 . 멜러드라마, 西部劇, 챤바라(일본 시대물) 문예물, 이런 것들을 휩쓸다시피하고 난 후, 차츰 영화를 감상하는 눈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영화는 배우를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이름을 보고 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이미 그때 터득한 진리이다. 일본영화는 쉽고 생활감정에 가까운데, 외화와 비교해서 너무 초라하고, 미국 것은 돈은 쳐들이는 데 교과서 같은 게 멋이라고는 없는 것 같고, 한동안은 프랑스영화에만 미친 때도 있었다. <여인들만의 도시><무도회의 수첩><망향><천국의 아이들>등 말하자면 마치 성인영화를 보는듯한 기분으로 .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때는 관객의 한 사람이었을 뿐 나 자신의 포지션이 영화를 만드는 쪽에 있으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만주의 新京에서 가수생활시작
여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형편상 진학은 포기하고 丸善(마루젱)주식회사에 취직을 했다. 서적부에 있었던 관계로 이 무렵에는 책 읽기에 열중했다. 물론 영화는 문제작만 골라서 보는 정도.
1년 3개월이 지난 1940년 초여름에 만주국 신경 반관반민의 모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 직장에는 혼성으로 이루어진 합창단이 있었고, 단원이 되자마자 나는 지휘자에 의해 방송합창단원으로 추천되었다.
방송합창단은 新京音樂團 합창부를 겸하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 갖는 정기연주회에는 교향악단과 합창단이 무대에 섰다. 이곳에 입단한지 1년 만에 나는 일본인 단원을 모두 물리치고 솔로 싱어로 완전히 신경음악단에 소속된 가수가 되었다. 그 때의 월급이 1백 20円(웬만한 봉급자의 월급이 50円 정도였다)으로 사무직원을 빼고, 여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음악단에서 홍일점인 나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였다. 영화에 미쳤던 문학소녀는 이제 하루 종일 노래로 이야기하는 카나리아로 변신했다. 신경음악단이 滿洲映畵株式會社와 자매회사였던 관계로 우리는 가끔 녹음관계로 영화사에 출입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차츰 차츰 나의 영화광적인 신경에 다시 자극을 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합창이건 독창이건 노래하는 시간이 즐거웠던 것도 잠시. 支那事變(중일전쟁)으로 세월은 각박해지고 노래도 따분한 御用 노래로 바뀌게 되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종합예술인 영화의 언어가 훨씬 호소력이 있고 나의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여름 휴가로 서울(경성)에 돌아왔을때, 조선영화사에서 영화음악을 담당하고 있던 김준영씨(필차의 모친의 여고동창생의 아들)를 졸라 최인규 감독을 소개받았다. 최감독은 나에게 <太陽の子等>(태양의 아이들)이라는 시나리오 한권을 주었다. 집에 가서 읽어보고, 하고 싶은 역할이 있는가 보고 다시 오란다. 내가 원한 것은 뒷 스탭의 일자린데 최 감독은 연기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나의 2년 선배 김숙자씨가 <君と僕>(그대와 나)라는 영화에 주연을 한 일이 몇 해 전에 있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여주인공 자리에 놓고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공감도 없고 감흥도 일지 않는다. 결국 연기자로서의 소질이 없는 것이다. 나는 다시 최감독을 만나지 않고 신경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단원들이 하나둘 출정으로 자리를 비게 되었다. 교향악단도 합창단도 이제는 거의 제구실을 못할 지경으로 되어 갈 무렵, 경성에서 후생악단원을 초빙해서 자리를 메우기 t작했다. 한둘 있을까 말까 하던 우리 동족이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신경음악단으로 변했을때 8 15의 종전이 왔다.
스크립터로 들어선 영화계
해방 -- 그 감격을 미처 누릴 사이도 없이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일본인촌을 습격해 오는 만주인들을 피해 숨을 자리부터 찾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이 좀 가라앉을 무렵에는 소련군의 눈을 피하려고 얼굴에 숯 검둥이 칠을 하고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여성으로서의 경계 조선여성에게는 다소 관대하다는 말을 듣고 밤새 앉아서는 한복 저고리를 만들던 기억. 그 한복을 입고 내가 귀국길에 오른 것은 9월도 하순이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신경서 신의주까지 기차를 타고도 닷새. 북한 땅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운이 좋으면 화차 지붕 위에라도 매달리고 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걷고 또 걷고 하며 한발자국이라도 남하하려고 바둥바둥 애를 태웠다.
평양에 들어서자 일본인으로 오인받고 심문받은 일도 여러 차례. 열심히 한복까지 만들어 입고 있는 나였는데 바느질 솜씨가 서툴렀는지 옷입은 나의 모습이 거북살스러웠는지 그것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좌우간 유창한 모국어의 대꾸가 없었더라면 도리 없이 일본인수용소로 연행되어 갔을 것이다.
2백리 길을 걸어서 개성에 이르렀을 때 미국들에게서 제일 먼저 받은 선물은 DDT세례였다. 그 다음에 먹을 것, 야만인 같은 소련군만 보아오던 나의 눈에 미군은 너무도 댄디한 신사로 보였다.
서울에 들어선 것은 그 해 11월 초순-얼마 안있어 나는 정동에 있는 중앙방송국 합창단 멤버로 편입이 되었다. 최해남씨(납북)가 지휘를 맡고 있었고 지금은 모두 대학교수가 된 일본음대출신의 성악가들이 멤버의 대부분이었다.
당시, 돈암동에 살고 있던 필자는 역시 같은 멤버인 박용구씨와 자주 귀로를 같이 했다. 우리집에서 언덕하나를 넘으면 박용구씨댁이 있었다.
박선생은 합창 말고도 음악에 곁들여 나가는 시낭독 시간의 프로듀서를 겸하고 있어서 나에게 자주 시낭독의 기회를 주었다.
일본말을 지껄이고 일본말로 글을 쓰곤하던 (여고 3학년때 조선어라는 명목의 우리 모국어는 아주 교육면에서 자취를 감췄었다) 내게, 아름다운 우리말의 얼을 다시 심어준 분이 박선생이었다.
그 무렵 명동파출소 뒤쪽에 자리잡은 에덴다방은 예술인의 집합소-채정근(납북) 박계주(고인) 최영수(납북)제시와도 자주 어울리며 나는 어느듯 노래하는 문학소녀로 다시 탈바꿈해가고 있었다.
1949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고 기억한다. 앞서 말한 네 분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역시 돈압동에 살고 있던 최인규감독의 집이었다. 그날 파티에 참석한 또 다른 세분은 전창근(고인) 박남옥(한국최초의 여류감독) 황려희(자유만세의 여주인공)제씨와 최감독 부부.
자연스럽게 2년전 내가 최감독을 찾아 갔던 이야기가 나왔고,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추천되어 최감독은 나에게 다음 작품 크랑크 인과 동시에 뒷 스탭으로 일거리를 준다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1947년 3월. 드디어 고려영화사에서 <罪없는 罪人>이 크랑크 인 되었고 나는 스크립터로서 그다지도 오랜 세월 동경하던 영화계에 첫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다.

밤과 낮이 없는 영화계
관객의 한 사람으로 감상하고 마음껏 비판하던 위치에서 영화계 초년생으로 신분이 확 떨어진(?) 나에게는 그 세계의 누구나가 상전이요 스승인 것이었다.
촬영현장을 따라다니며 제일 먼저 안 것이 영화제작 과정에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며칠 밤이고 일이 있으면 새워야했다.
잠자리만 바뀌어도 잠을 못자는 나는 낮잠도 못자는 성미여서 처음엔 무척 애를 먹었다. 송곳 모냥 곤두선 신경으로 행여나 실수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어떻게 들어선 문인데 하고.
그 당시 찰영 기사였던 한형모씨, 조명기사였던 김성춘씨, 조감독이었던 조정호씨, 홍성기씨등 모두 사귀고보니 참 좋은 분들이다.
외국에서는 스크립터라는 직책을 독립분야에 넣는 모양인데 한국에서는 연출부 소속으로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뒷스텝 진영이라 자연 나는 여자연기자들하고 가까운 거리를 갖게 됐다. 황려희 최지애(도미)가 주로 나의 말벗이 되고 있었다. 특히 황려희는 나와 여학교 동문(5년후배)이어서 더욱 다정 할 수 있었다.
28년전의 일이라 그 때의 일은 별로 많은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한가지 죽도록 잊히지 않는 광경이 있다.
안국동 윤보선씨댁을 오픈세트로 이용해서 밤을 새운 초여름 새벽- 별채의 넓은 정원에서 두 마리의 학이 왈츠를 추던 모습, 검푸른 새벽하늘에 반짝이는 별, 이슬에 젖은 푸른 잔디, 장미 향기가, 코끝에 감미로왔다.
두 마리의 학이 자웅이었는지 동성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좌우간 2미터 가까운 날개를 펼치고 서로 바라보며 추는 춤은 정말 일대장관이요 생의 신비였다.
그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을 본 며칠 후 나는 다른 촬영현장에서 너무나도 끔찍스럽게 잔인하고 추악한 인간의 갈등을 목격하게 되었다. 정이 떨어졌다. 그렇게 갈망하고 동경하던 세계의 이면은 이런 것이었던가. 지금 정도로 나이가 들면 인간이 사는 곳 어디 가나, 그런 광경은 있는 것이라는 것으로 돌려버릴 수 있었지만 그 당시 여리고 물들지 않은 나의 감정은 너무나 심한 거부반응으로 꽉 차 있었다. <죄없는 죄인>촬영을 억지로 끝마치고 나는 미련 없이 영화계를 버리고 결혼생활로 들어갔다.
양가의 부모가 반대하고 친지들의 대부분이 반대하는 그런 결혼이었다. 이혼의 조건을 안고 뛰어든 결혼인 셈이었다.
결국 결혼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지만 4년 8개월의 결혼생활을 견딘 것은 나 자신이 우기고 결혼했다는 오직 그 한가지의 이유 때문이었다.
동란후 다시 영화계로
1953년 초가을 - 일반시민들보다 조금 앞서 우리 식구는 (친정어머니와 그 당시 문교부에 재직중이던 남동생, 그리고 나와 나의 딸)서울로 올라왔다. 삶의 투쟁으로 복닥거리던 부산에서 올라와 보니 전쟁의 상흔이 도처에 깔려 있는 수도 서울에는 무서우리만치 스산한 고요가 감돌고 있었다. 낙엽이 바스락 소리 내어 딩구는 서울 거리를 나는 한없이 허무에 젖어 걷고 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서울 거리라 해서 빛깔이 없었을리는 없는데 왜 그런지 나의 뇌리에는 흑백의 영상으로만 그 때의 광경이 남아 있다. 다만 언밸런스하게도 흑백의 영상위로, 빨려들어갈 듯 푸른 하늘이 있었고, 음악 대신에 낙엽이 구르는 사운드 에펙트가 깔리고 있었다.
그 거리 한 모통이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를 향해 웃고 있다. 촬영기사H 씨 - 반가왔다. 5년만의 해후! 사회와 완전히 멀어졌던 5년이었지만, 그 거리는 단숨에 좁혀져, 어제 일인양 공동화제의 꽃이 피었다. 전쟁이 나자 곧 카메라를 들고 뉴스 현장을 뛰어 다녔다는 H씨에게서 최감독과 채영근씨, 최영수씨가 납북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혼자 살아갈 작정이라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그가 얼마 후 집으로 찾아와 영화계에 컴백할 것을 권유했다.
조감독이었던 조정호감독의 <여군> - H씨의 카메라, 나는 조감독 겸 스크립터로 또 다시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다. 그 때의 여주인공으로 라애심이 데뷔한 <여군>은 세미다큐멘터리의 30분물이었다.
그 뒤를 이어 전창근 선생 밑에서 <불사조의 언덕><단종애사>등 5개 작품, <수정탑>에서는 문혜란이 데뷔했는데 그녀는 나의 10년 후배인 동문이었다.
이 무렵은 휘가로 다방(명동)이 예술인의 집합소 - 유두연(작고) 이진섭, 박인환(작고), 황영빈, 허백년제씨가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평론가로 각광을 받고 있었고, 촬영이 일찍 끝난 저녁이면 으레 전선생과 함께 어울려 맥주홀에서 마시고 기염을 토하는 것이 일과로 되었다. 술이라고는 마실 줄도 모르는 나였는데도 꼬박꼬박 잘도 따라나녔고, 또 꼭 대동해 다녀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그 분들이었다.
감독의 길은열렸으나
스크립터 겸 조감독의 생활의 10년 남짓 흐르는 동안, 여가를 이용해서 시나리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오리지날 작<파문>(영화화 때 <유정무정>으로 개제)이 팔린 이후, 유두연씨와 공동각본 등으로 더욱 접촉할 기회가 생겼고, 드디어 유두연씨가 <조춘>으로 메가폰을 잡게 되었을 때 나에게는 콘티뉴티 담당 치프 조감독의 포지션이 주어졌다.
여성으로서 치프 조감독자리를 차지하기란 동서를 막론하고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잘 모르기는 해도 유선생 정도의 모더니스트가 아니고서는 감히 여성에게 그런 자리를 주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장경험이 전혀 없는 유감독의 첫 작품인만큼, 조감독인 나의 위치는 그야말로 밤 낮을 가리지 않는 고된 일거리가 쌓여 있었다. 하지만 고된만큼의 보람 있는 일이었고 인화로 뭉쳐진 즐거운 분위기였다.
<조춘>에 이어, 같은 스탭으로 <사랑의 십자가> 이렇게 두 작품을 하는 동안 나의 긴 영화계생활을 통해서 생각할 때, 가장 즐겁고 의욕에 찬 시기였다고 여겨진다.
그 뒤를 이어 노장 윤봉춘 감독밑에서 <여인천하> <애정 삼백년>의 조감독을 했지만 두 작품이 다 시대물이어서 나에게는 감각적 공감이 별로 없었고 고증에 자신이 없어서 훌륭한 일꾼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서서히 나에게는 영화연줄부에서 밟게 되는 마지막이자 최정상의 단계인 감독의 길이 열려가고 있었다.
1962년 4월 - <사랑의 십자가>때 촬영을 담당했던 장환기사가 한권의 시나리오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이름하여 <여판사> -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판사 사건에서 약삭빠른 상혼으로 쓰여진 대본이었다.
여류감독의 첫 메가폰 작품이 <여판사> - 어느 의미에서나 매스콤을 타기에 충분한 조건이라는 것이 제작자의 노리는 바였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구미에 당기는 대본은 아니었다.
대본을 내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는 조건부로 수락을 했다. 막상 대본을 들고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자칫 작품이 공개됨으로 해서 모델케이스의 입장에 서게 될지도 모르는 피해자들의 문제, 후반의 클라이막스를 이룰 재판장면의 처리문제, 이런 것들에 중점을 두고 나는 당시 가정법원 판사로 계시던 권순영 판사를 찾아가 어드바이스를 청했다. 권판사는 바쁜 중에서도 싫은 말 한마디 없이 눈먼 사람에게 길을 인도하듯 자상하게 응해주셨다.
대본의 재프린트가 나오고 크랑크인 날짜가 잡혔다. 로케, 헌팅, 콘티짜기 모두 순조롭게 나가던 6월 어느날. 정부에서 단행한 화폐개혁으로 첫 영화는 찬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쉽게 이야기가 풀리드라니 . 그것이 나의 책임일 수는 절대로 없지만 공연히 죄진 사람처럼 기가 죽었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조감독으로 있을 때는 그런 문제에까지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번 불안해 지기 시작하니까 이것저것 불안이 꼬리를 문다.
유능한 조감독이 반드시 우수한 연출자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 단적인 예로 K 모감독을 보아왔다. 조감독의 보조역할을 한 사람이 감독이 되어 만들어 놓은 작품이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 되어 있었느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한여름 혹서로 접어들면서 역사적인 크랑크 인이 원효로 세트장에서 거행되었다. 크랑크인의 첫 커트가 들어가기 전, 영화가의 관습인 고사가 지내진다. 한 시루의 떡, 삶아논 돼지대가리, 북어 몇 마리를 놓고 막걸리를 부어 올리며 큰 절을 하는 그 행사 말이다.
이 고사에 한해서는 그리스도교인도 무신론자도 없다. 속으로는 거부반응이 있어도 결코 내색하지 않고 넙죽넙죽 절들을 한다. 막대한 돈을 들이고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일에 사적견해는 금물이다. 푸짐한 막걸리와 고사떡을 둘러싸고 오가는 정담이 인화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는 그만인 것이다.
군소기업으로 지방흥행사의 주머니 돈에 의존하는 영화제작에는 감독의 이미지나 플랜같은 것이 묵살되기 일쑤이다. 모든 것이 제작자의 주머니 사정으로 회전하니 말이다.
A라는 연기자가 필요한데 개런티가 비싸다고 하면 도리없이 B, 헌팅해놓은 장소는 A인데 빌리는 값이 비싸다면 B나 C, 이런 식으로 떨어지자면 한이 없어서 고집을 내세우고 시어도 자칫 잘못 하다가는 모처럼 잉태한 아이가 아들은커녕 딸도 아닌 그냥 핏덩어리로 유산이 되어버리는 예도 허다하다.
또 한가지 아찔한 일은 지방흥행사의 구미에 맞춰야 한다는 일 - 입도선매로 그들의 돈을 갖다 쓴 이상, 제작자측은 항상 빚진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대목에서는 좀더 된장을 풀고 저 대목에서는 코미디를 가입시키시오」「네 어느 령이시라구요」
이름 없는 감독의 이 아픔. 에이 참아야지, 참고 주어진 여건 한도내에서 최선을 다 해야지, 그 짓을 못하겠으면 아예 감독을 하겠다는 꿈을 버려야지 하며 자위하기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이 영화가 전체의 상황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내가 내놓은 작품 세 개는 거의 이런 상황속에서 세상에 태어났고, 홍일점 여감독은 기술시사 때마다 간이 콩만해져 가지고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지방흥행사님」들의 안색을 살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한번도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욕설을 퍼부으며 나간 사람은 없었지만, 참으로 비참한 이야기이다.
비참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또 한가지 비참했던 이야기를 해야겠다.
두 번째 작품「홀어머니」때의 일이다. 이 때에도 주어진 대본은 나의 구미를 자극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며칠이 걸려 대본을 뜯어고치고 크랑크 인은 해놓았는데 제작자의 자금사정은 악화일로, 하늘에 별 따기로 얻어놓은 겹치기 연기자의 스케줄을 촬영진행비가 없어서 그냥 놓쳐버리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한 사람을 잡아다 놓으면 다른 한 사람이 기다리다 지쳐서 사라져 버리고 하는 식으로 힘겨운 찰영이 3분의 2쯤 끝났을 때, 제작자는 영영 그 뒤를 이을만한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그 후 영화를 포기한지 수개월 만에야 부산의 흥행사였던 한갑진 사장이 그 뒷수습에 나섰다. 주인공들의 초라한 집을 돈암동 개울가에 헌팅해놓고 내부는 세트로 집밖의 장면은 이미 찍은 뒤였어서 어느날 밤 신을 찍으러 스탭들은 현장을 향해 떠났다. 그런대 현장에 도착해 보니 우리가 찍어야 할 초라한 건물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그곳엔 새 양옥집이 들어서 있지 않은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 .
연기자는 그 날 이후에는 절대로 스케줄을 낼 수가 없단다. 웬만한 장면은 삭제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지만, 그 장면들은 연결상 도저히 빼버리고 넘어갈 수 없는 장면들, 궁여지책으로 짜낸 안이 웃지못할 넌센스였으니 개울가 어느 집 앞에다 일면짜리 셋트를 세운 것이다. 그렇게 촬영을 끝마치고 다시는 죽는 한이 있어도, 이렇게 초라한 감독 노릇은 하지 말아야지 하며 소리 없는 통곡을 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만든 세 작품 가운데 그래도 가장 나은 환경에서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 마지막 작품인 「오해가 남긴 것」이었을까. 1965년도의 작품이었다.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빛 좋은 개살구 「홍일점 여감독」은 지금 이 시점에서 할 말이 없다. 문턱을 들어서기까지의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꿈은 결국 이루지 못하고, 초라한 몰골로 뒷문으로 자취 없이 사라진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그곳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글쎄 무엇일까. 가까웠다 사라져간 친구들의 (너무나 많은 지기들이 타계하고 납북이 되었다.) 추억. 그리고 커피, 담배 같은 중독성 기호. 밤에는 말똥말똥 잠을 잊고 새벽이 되어야만 잠이 드는 습관. 쥐뿔도 없는 주제에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살자는 배짱. 참 또 있지. 세상 일이 꿈이나 정열이나 인내심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
지금은 고인이 된 류두연씨가 한말이 생각난다.
「홍은 환갑이 지나도 다람쥐처럼 영화판을 누비고 다니며, 카나리아 같이 노래를 부를 거야」 그러나 그 말은 이미 내게서 멀어진 말이 아닌가?
「류선생님, 환갑은커녕 50도 못돼서 나에게는 발들여 놀 한뼘의 공간도 없어진 영화현장이 되었어요. 그리고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는 많은 친구들을 저 세상에 보내고 노래마저 영영 잊었어요. 아, 가만히 있어봐요. 어디선가 노래소리가 들리네요. 아직은 확실치가 않지만 그 소리는 내 딸아이의 목소리 같아요. 엄마가 잊은 노래를 어쩌면 나의 딸아이가 찾아줄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애가 엄마 닮아서 영화라면 미치도록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아마 그 애는 나처럼 승산없는 일에 뛰어들지는 않을거예요.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면 뛰어들겠죠. 난 그렇게 믿어요, 꼭 그렇게 믿고 있어요. 내가 낳은 작품 중에는 가장 우수하다고 볼 수 있는 영리한 아이거든요.」
月刊 世代, 1976년 신년호
 

처음 오셨나요?